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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1

1. 68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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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1-06-0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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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8운동
 
  약 반세기 전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벌어진 격렬한 시민운동을 새삼 회고해 본다. 격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시대정신(Zeitgeist)이 드러난다 해도 이것이 반드시 40여년 전 독일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폭발적인 사회운동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혁명적 폭발성과 함께 사고의 패러다임 전환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68혁명’의 의의는 오늘날까지 깊이 되새겨지고 있다. 초기에는 학생운동(Bewegung), 또는 학생폭동(Revolte)으로 불리던 이 운동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혁명’으로 불릴 만큼 독일사회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68세대 혹은 단수로 ‘ein 68er’라고 불리던 운동참여자들은 어느덧 50대에 접어들었다. 이 운동이 갖는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당시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각 나라마다 직접적인 계기와  전개과정은 다르지만 운동의 기본이념은 같은 뿌리를 지닌 것이었다.

  68운동의 동기

  2차 대전 이후 60년대 말까지 유럽 국가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20년 간 물질적으로 전례 없는 번영을 이루었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맞선 대규모 반항이 일어난 것은 전통과 가치에 대한 부정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는 두 번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후에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중추 역할을 한 세대인 반면, 풍요 속에서 성장한 전후 세대는 삶의 양식이나 정치, 문화의 변화를 갈구하면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이나 질서의식에 도전하였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임금인상이나 계급 투쟁적 요구를 담지는 않았고, 물질적 요구가 아닌 삶의 질의 향상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는 저항운동으로서 정치, 사회, 문화의 경직성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이 대규모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Herbert Marcuse를 꼽을 수 있다. 1930년대 유대인 실업가의 지원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 부설 ‘사회문제 연구소’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그는 30년대에 나치를 피해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였다. 초창기인 30, 40년대부터 이 사회연구소는 산업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Ideologiekritik), 권위주의 연구 등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였고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형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이상, 즉 유토피아로서의 자유, 평등이념 등을 현실사회에서  실현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특히 마르쿠제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병폐와 모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도 산업사회의 위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현존사회의 비판적 극복에 의한‘인간해방’등을 관심대상으로 삼았다. 모순과 착취가 없고 자유의 실현이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그의 사상이 학생층에게 이념적인 견인력을 발휘했지만, 68년 학생운동이 폭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비판이론 자체는 일반의 큰 관심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학생운동에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영향을 끼친 것은 오히려 당시의 특수한 정치, 사회 상황이었다. 월남전을 벌이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고  과거 사회규범에 반항하는 젊은 히피 층의 생활양식과 자유분방한  태도는 독일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때마침 독일 국내  정치적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grosse Koalition)으로 인해 야당이 제 기능을 못하는 공백상태가 발생하자 학생층을 중심으로  원외 야당(auss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이라는 저항세력 형성에 박차를 가하였고 전후 세대 사이에서는 당시 독일사회  전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이 고조되어  갔다. 이전 세대는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상당수가 히틀러  독재에 동조했으며, 이들은 히틀러가 저지른 미증유의 잔학행위에 대한  전후의 정신적인 청산작업을 거부해 왔다. 이런  상황은 60년대 말까지 독일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교육청은 전체 교사들 중 상당수가 나치정권의 동조자였기에 이들 간에 있을 수 있는 감정대립을 피한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를 들어 나치시대 역사를 교과과정에서 삭제하였다. 이 사례만 보아도 양식 있는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처럼 빵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 데에  도취되지 않고 삶과 의식의 영역에서 과거를 탈피하여 새로운 가치관과 한층 질 높은 문화를 창출하려 하였다. 물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율성, 개방성, 다원성,  개인의주체성이  따르지 못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었다.

  68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

  독일 내 68운동은 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전체 대학도시로 확산되어 갔다. 특히 베를린이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베를린시가 전승 4개국 통치하에 놓여  있어 이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은 군복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이나 국가에 대한 반항의식이 강한 학생들은 전국에서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도 베를린에서 였다. 1967년 당시 독재자로 군림해 있던 이란  국왕 팔레비의 베를린 방문에 항의하는 반대 데모가 벌어졌는데 이 때 경찰의 총에 맞아 한 학생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격렬한 반응과 폭넓은 의식화의 계기가 된 이  죽음이 없었던들 68운동은 훨씬 가볍게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반권위주의적 성격의 운동이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되어가면서 전체 학생의 65%가 점차 정치의식화 되었다고 전해진다. 학생들의 주장은 반미, 월남전 반대, 보수언론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점차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 기성세대의 가치관,    규범, 도덕적 표상에 대한 거부 등 사회 전면에 깔려 있는  권위의식에 대한 반항운동으로서 정치적인 색깔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이 내건 슬로건에서 이 운동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보면 ‘Traue keinem ueber 30. (나이 30이 넘은 자를 신뢰하지 말라.)’, ‘Es ist verboten zu verbieten. (금지하는 것은 금지된다.)’, 좀 더 과격한 표어로는 ‘Macht kaputt, was Euch kaputtmacht. (너를 파괴하는 자를 분쇄하라.)’, ‘Es lebe Mao! (모택동 만세!)’라는 구호는 대학가 건물 구석구석을 장식하는 표어였다. 데모행진 시 학생들이 즐겨  사용한 구호로는 ‘USA SA SS!’와 ‘Ho-Ho-Ho-Chi-Min!’ 등이    있다. -SS, SA는 히틀러 정권하 만행에 참여한 특수부대이다- 당시 사회상과 68운동의 동향을 보면 일차적인 목표가 탈권위주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68년 함부르크대학에서는 전통 예복을 걸치고 엄숙히 거행되는 오랜 전통의 대학총장 취임식이 데모학생들에 의해 방해 받으면서 이 전통의식이 한갓 조롱거리가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조차도 교사들이 토대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학생들과 합의한 후에야 교과내용을 선택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교육의 기회균등이 평가의 기회균등까지 포함하는 중요한 실천목표가 됨에 따라 지식층 자녀들에게 평가상 불이익을 주어 균등사회를 이루려는 교사들의 과격한 양상도 나타났다. 대학 내의 일반 학생식당과 구분되어  있던 고급 교수식당이 폐쇄되어 더 이상 교수식당과 학생식당 간 구분이 없는 평등공간이 만들어졌다. 요즘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만 68년 이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에펠탑아래서 경찰의 눈을 피해서나 구할 수 있는 희귀품이었던 포르노잡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포르노 잡지『St. Pauli』는 12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할 정도였다. 대학 학과 내의 권위주의적인 연구소 소장제도가 없어지면서 정교수의 힘은 약화되고 학생과 중간층을 포함하는 3자 협의체(Drittelparitaet)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학생들 간에는 존댓말이 사라지고 ‘du’가 일상화되었다. 심지어 교수에게도 자극적으로 ‘du’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특히 사회과학부에서는 교수와 학생 간 존댓말이 사라졌다. Fremdbestimmung, Emanzipation, reflektieren, faschistoide Tendenzen, ins Bewusstsein heben, repressive Gewalt, autoritaere Struktur 등의 사회학 용어들이 학생층이 즐겨 구사하는 언어로 일상화되었다.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교육, 여권신장, 성 해방, 가정 내 구성원간의 역할, 일상 의복, 일상 언어 등 문화 전역에 이르는 변혁과 더불어 철저한 토대민주주의(Basisdemokratie)의 실현도 강력히 요구되었다. 한편 이 68운동은 격렬한 초기의 양상에 비하면 오히려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학생들의 강력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배부른 노동자층에게 까지 점화되지는 않았으며,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에 응해 대학구조 개혁,  교육개혁 등을 추진함으로써 어느 정도 무마정책에 성공하였다. 이 당시의 전 국민적인 정치의식의 좌경화는 1960년 사민당 Willy Brandt의 집권을 가능케 했고, 곧이어 그는 공산권과의 화해정책(Versoehnungspolitik), 동방정책(Ostpolitik)을 끈기 있게 추진하였다. 이때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념적인 분열과 함께 물리적인 가두투쟁으로부터 후퇴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사민당 노선에 흡수되어 갔고 일부는  탈권위교육(antiautoritaere Erziehung)을 표방하는 아동교육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상당수는 노동계급의 의식화를 위한 전략으로서 장기적으로 ‘기성제도 하에서의 긴 행진(langer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이라는 길을 택하여  산업현장에서의 노동자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다른 일부  극좌세력은 지하로 잠입(untertauchen)하여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를 조직, 테러리즘의 길을 택하였는데 이들은 98년  봄에야 자체 해산을 공표하였다. 당시는 경제가 번영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낙관적이던 때라 노동자층은 전혀 학생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단을 뿌리는 학생들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1천만 명이 참여하여 총파업을 벌였던 프랑스의 68운동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은 임금인상이나 계급의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68운동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일 큰 약점은 집약적인 조직의 부재였다. 구심점이 없는 정치운동으로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운동성과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각기 성향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공산당이 창설되고 약 10만 명의 온건파는 사민당에 입당했다.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392개의 극좌파 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학생들의 운동은 2년 간의 격동기를 거치고 난 후 8년여에 걸쳐 서서히 냉각되어 갔다.

  68운동에 대한 회고와 평가

  68운동이 독일 사회에 남긴 역사적 교훈과 오늘날까지 이 사회에 미치고 있는 구체적인 영향은 무엇일까? 이제 역사적인 안목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혹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명백하게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지향하던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들이 타파하려던 자본주의체제는 오늘날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오히려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승리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68혁명’이 독일인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전격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다.  현재 이 세대의 상당수가 정부, 정당, 교육계 등 사회 전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전형적인 ‘독일적인 것(Deutschtum)’을 거부하는 가운데 청바지,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게 되고, 부모들 세대의 생활감정보다 영국, 프랑스, 미국식의 새로운 다국적, 다문화적 생활감정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30년 전에는 기혼 부인은 남편의 서명 없이 은행구좌를 개설할 수도 없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되어 있었으며, 성폭행으로 임신한 경우에도 낙태는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비하면 마치 암흑기를 연상시킨다. 이제 고등학교 및 대학과정에서 여학생은 남학생과 동등한 비율이 되었고, 낙태문제는 거의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며, 언어 면에서도 미혼, 기혼을 가르는 ‘양(Fraeulein)’이라는 단어가 생활 속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렇게 내면적인 생활상의 변화와 더불어 권위주의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 68운동이 유년기의 독일 민주주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좀 더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로 진입하는 문호를 터놓은 것이다.
  68운동의 또 다른 성과로는 주로 68세대가 주축을 이루어 성장한 환경운동의 선도자인 녹색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집권경험은 없지만 이 정당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의 자세 역시 68세대에 의해 결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이 가시적인 사회변혁을 유도했음에도 불구하고 68운동이 낳은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현 사회가 드러내는 부정적 사회상의 원인을 통틀어 68운동에서 찾고 있다. 68운동이 권위의식 해체에서는 극히 성공적이었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 및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권위의 형성에서는 무력했다는 지적이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대체가치관 형성에서 균형감을 잃었고, 일방적인 탈권위가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키웠다. 연대의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을 약화시킨 이러한 경향에 대해 전 수상  슈미트는 68운동이 이 사회에 본질적인 도덕성의 결여를 유발했다고 주장했으며, 보수적인 한 언론인은 ‘68세대가 히틀러 정권보다 더 많은 가치관을 파괴했다.’고 까지 표현했다. 모든 사회악에 대한 책임을 68세대에게 돌리는 극단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운동권 내부에서도 68운동은 실패한 혁명이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자기방어능력을 개선, 강화시켜왔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권위주의를 거부한다면서 운동가들 자신이 권위의식에 젖은 행동을 일삼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도 했다.  한편 80년대 들어 68운동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녹색당이  토대민주주의(Basisdemokrtie)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대혼란만 초래했다. 게다가 68세대는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민주적 규칙을 스스로 어겼다. 회의장에서 비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결과 조작과 권위적인 행태 등 비민주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독일사회에서 가장 열띤 쟁점거리는 탈권위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미친 영향이다. 만약 2차 대전 이전 세대가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나치정권과 같은 체제를 낳지는 않았으리라는 역사적 인식으로부터 사실상 탈권위 교육이68운동의  핵심적인 기본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탈권위와 더불어 전통가치 자체가 부정되면서 대안이 없는 공백상태에 빠졌고, 권위를 포기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이들 역시 방향감각을 잃고 학업에 대한 열의와 동기부여 자체를 지니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68세대는 가치질서를 파괴하고 말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자율적인 책임의식, 사회참여의식, 예절교육, 사회성,  인간존엄성의 존중, 종교 교육, 질서 의식 등 보수파에서 내세우는 교육의 목표 대신 68세대는 인간해방, 갈등에 대응하는 극복 능력, 자율적인 결정권 등을 중시한 교육이념을 추구한 결과였다. 학원 내 폭력이나 심지어 신나치들의 운동까지도 그 책임은 무질서를 방관하고 대체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한 68세대에게 전가되고 있다. 사회변혁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교직을 택한 68세대가 이제 자신들의 산물인 권위를 부정하는 차세대에 의해 심한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오히려 요즘은 교사들이 다시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68혁명 참여인물의 그 후

  68세대는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소멸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기성사회에 동화 흡수된 셈이다. 이들은 교사, 법조인, 언론인, 교수, 정치가 등 사회요직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학생운동이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졌듯이 이들이 걸어온 사회동화의 길도 매우 다양한 모습이다. 변호사의 딸로서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한 후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남학생들이 주도하던 사회주의 학생회(SDS)에 반기를 들었고, 프랑크프르트 대학 사회연구소에서 활약하던 아도르노 교수에게 계란 세례를 퍼부었던 한  여학생은 ‘아도르노 교수는 당시 매우 당황하며 절망적인 상태를 겪었다고 한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를 거쳐 지금은 시에서 경영하는 여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가장 평범한 사회진출의 경우이다. 법학을 전공하고 현재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68세대 투사,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모택동의 영접을 받기도 했던 녹색당 시의원, 부동산업계에서 직장을 구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거부가 되어 구 동독의 유명 출판사를 인수한 경영인도  있다.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의 숫자는 엄청나다. 이 중에는  녹색당 창당 시부터 활약해온 인사들이 많지만 좀 더 온건한 길을 택한 사민당 인사들의 활약도 주목을 끈다. Schroeder를  위시하여 현재 사민당소속 주지사는 거의 대부분 68시대에  활약하던 극렬파 출신들이다.
  최근 다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콘-벤디트(Cohn- Bendit)이다. 그는 유대계출신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가  생활근거지였다. 프랑스 낭뜨 대학에서 68운동이 처음 터질 때부터 이 대학 주동인물로 활약했고 그 후 독일과 프랑스를  왕래하며 활동무대를 넓혀간 그는 80년대부터 녹색당원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프랑크푸르트 시의원, 주정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9월 중순 톱 테러리스트로 지명수배 받던 Klein이 프랑스 시골 은둔지에서 체포되자 콘 벤디트는 자신이 계속 그에게 재정지원을 해왔다고 고백했다. 옛 동지로서 충실하게 의리를 지키느라 그렇게 오랫동안 범법행위를 한 데 대한 놀라움은 컸다. 물론 그는  유럽연합의회 의원으로 치외법권의 혜택을 받았으나 기민당측의 공격은 만만치 않다. 현재 독일의회 녹색당 원내총무인 Fischer의 경우에는 80년대 초, 헷센 주 경제장관 암살에 사용된 권총이 그의 승용차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요즘 다시 상기되고 있다. 적군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현역 정치가들의 근황이다.
  이런 소란의 와중에도 학구파로 남아 현재 학계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수는 약 30명으로 집계된다. 이들보다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사들은 진보성향의 언론과 각급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중견 교사층이다. 이 교사들은 요즘도 “나도 68세대였다.”는 소신과 자부심을 학생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낙오자가 된 과거의 투사들도 적지 않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3년 전 베를린 대학의 집계에 따르면 독문과 학생 중 1400여 명이 10년 이상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고 이중 150명이 45학기 이상 된 68세대의 잔류자로서 마치 대학을 안식처로 삼고 있는 부류인 것으로 판명됐다. 최고 학기 수는 57학기. 그러나 독문과 이외에도 사회과학부에는 훨씬 더 많은 68세대의 은둔생활자가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68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68운동의 자취가 오늘날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위에서 보았듯이 관찰자의 시각과 성향에 따라 달리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사회문화적 혁명이 갖는 특성이라 하겠다. 우리의 관심사는 현 한국 상황에 대해 68운동이 무엇을시사하며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68운동의 기본방향이 권위주의에 젖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다. 독일과 한국의 권위주의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은 당연하며 그 폐해 역시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권위주의 전통이 서로 다른 근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 한국을 엄습했던 IMF 위기를 한국적 권위의식과 연계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IMF 발생원인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단편적인 이유가 거론되고 있고 위기 극복방안에 대해서도 정경유착 고리의 단절, 기업의 투명성, 사회의 개방성 제고 등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이러한 사항들은 민주주의와  분리하여 생각될 수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한국의 권위주의가 지금의 경제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을 잃고 하급자는 부정과 무능을 보면서도 하등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 경제계와 정계 모두에 공통적이었다. 경제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물론 역사상 제대로 권위주의를 청산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하기 쉽지만, 민주주의, 개방성, 투명성등과 권위주의는 상호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해외교포들의 눈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권위적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범법자가 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나서서 법원에 관용을 요청하고 이것이 법원  판결에 반영되는 일이 최근에도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실상이다. 삼권분립이니 법 앞의 평등이니 하는 구호는 ‘한국적 민주주의’ 와는 무관한 교과서적 지식에 속한다. 이런 논리를 연장해가면 권력자에게는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수천억 원을 사유재산으로  은닉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결론이 현실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끊임없이 ‘의식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독일에서는 68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문화적 혁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유행어처럼 나오는 한국의 구호식 의식개혁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구태의연한 의식개혁 구호가 앞서는 의식개혁이란 현실적으로 실현시킬  수도 없는 강박에 불과하다. 현재 정부에서는 다시 ‘탈권위’ 를 총체적 국정개혁 6대 과제에 포함시켰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경제위기 극복과 직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식개혁’ 이라는 과제를 실현하는 데 무엇보다 탈권위가 일차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유럽리포트*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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