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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함께하는 동지, 아내여 화해하자

작성일 21-10-1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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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조회 57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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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이 영문 잡지 <인카운터> 봉투 뒷면에 쓴 시 ‘이혼 취소’ 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거대한 100년, 김수영] (21) 여혐

김수영은 60년대의 시인이다. 60년대가 한국이 근대로 진입한 시기이듯 그 또한 한국 시의 근대성을 구축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4·19, 군사 쿠데타, 한일 협정과 3선 개헌, 공작 정치와 검열 등이 어지러이 지식인들을 옥죄었지만 동시에 시민사회의 맹아가 싹트고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모양이 다듬어져가던 시기였다. 핵가족의 형성과 성별 분업의 공고화 또한 이 시대의 어두운 업적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성별 분업적 재생산체계인 핵가족은 낭만적 사랑과 여성혐오라는 두 기둥 아래 펼쳐진 방주다. 여성들은 임금착취 당하는 산업현장 노동과 값없는 가사노동과 다양한 형태의 성노동으로 흩뿌려졌고, 동시에 전쟁과 극복 시기의 가족을 지키고 완성하는 책임도 짊어져야 했다. 이렇게 중요한 여성에 대한 탐구를 60년대의 우리 시문학이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으로 여성의 위치가 어떠했던가를 말해준다.

그런 가운데 김수영이 있다. 징그러울 정도로 “여편네” 타령을 하고 시의 도처에서 여성을 불러내는 시인. 김수영의 의식적 시인이 정치적 시대에 감응하고 자유와 혁명을 꿈꾸었다면 무의식적 시인은 유구한 문학적 ‘미소지니’의 전통을 넘어 현실 아내를 욕하고 때려눕히면서 시의 세계로 함께 들어왔다. 김수영은 왜 그토록 아내를 탐구했을까. 게다가 그의 시적 방법론이 아무리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이라 한들, 아내를 험담하다 못해 때렸다는 것까지 시로 써야만 했을까. 오늘날, “아내를 때리는 인성의 소유자가 쓴 시는 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젊은 여성들은 내게 말한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정직했기 때문에 김수영은 손쉽게 여혐 시인의 첫 줄에 서게 되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여혐 시인 김수영’이라는 글머리를 앞에 두고 오래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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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1963년 10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죄와 벌’. 맹문재 제공

죄와 벌과 여자

1963년에 김수영은 인상적인 시 두편을 발표한다. ‘죄와 벌’과 ‘여자’가 그 시다. ‘죄와 벌’에는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라는 충격적인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순히 한 폭력 남편의 고백으로만 읽기엔 두터운 시다.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 틀림없는 제목과, 첫 연에서 제시한 희생과 살인의 관계, “그러나”라는 접속어의 갑작스러운 등장 등은 이 시에서 아이러니한 어조를 읽어내게 하는 데 충분하다. 표면적으로 아내 구타의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거북해하고 ‘지우산’을 버리고 온 일을 아까워하는 진술은 “범행의 현장”이라는 시구절의 등장으로 위악임이 드러난다. 첫 연의 진술은 둘째 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의미를 개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온당하다. 즉, 살인할 용기의 부족 또는 부재. 라스콜니코프의 살인과 겹쳐 읽을 때 살인은 존재의 갱신이라는 종교적 목표와 이어진다. 수영은 그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자신을 혐오한다고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아내를 때린 것보다 죽이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고백하는 시를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는 역시 난제다. 심지어 그의 아내는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 시로 말미암아 많은 여성 독자가 더 이상 김수영을 읽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아내 살해, 데이트폭력 살해 등 가까운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여성 살해에 대한 분노와 공포가 점증되는 시대 분위기를 타고 다시 표면에 떠오른 것이다. 김수영이 왜 그토록 아내를 시에 등장시켰는지, 김수영에게 여자는 어떤 존재인지 등 필연적인 질문들이 자칫 “읽지 않겠다”라는 손사래에 밀려 지워질 위기감도 생긴다.

일반적으로 시문학에서의 ‘미소지니’가 여성을 천사, 선한 존재, 구원 등의 이미지로 타자화하는 데 비해 김수영 문학에서는 아내가 일종의 악역을 맡고 있다. 그 자신도 말했다시피 여편네를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쓰는 것은 졸렬(‘시작 노트 4’)하지만, 그의 ‘여편네’를 주체의 동일성의 어두운 측면, 즉 섀도라고 볼 여지도 있다. 김수영은 “여편네는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 중간물”(산문 ‘마당과 동대문’), “너와 내가 반반”(‘만용에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수영에게 “여편네”는 독립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분신인 셈이다.

&lt;사상계&gt; 1963년도 문예특별증간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여자’. 맹문재 제공
<사상계> 1963년도 문예특별증간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여자’. 맹문재 제공

시 ‘여자’를 통해, 아내 또는 여편네 말고 여자 그 자체가 김수영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읽어보자. ‘여자’는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시작된다. 남자인 나는 집중을 배워야 하는 동물이라는 인식이 따라온다. 여자는 나에게 설움을 가르치는 존재다. 설움은 김수영의 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그 설움을 배우기 위해 수영에게는 집중의 경험이 필요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이브와 뱀을 상기시키는 시의 두번째 연에서 그는 여자를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라고 부르고 죄와 속죄를 이야기한다. 본질적으로 이 죄는 ‘죄와 벌’의 죄와 동의어다. 죄, 속죄, 희생, 뱀 같은 기독교적 상징을 끌어다가 김수영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여자가 에고이스트, 즉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 독립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수영이 아내를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닌 중간물로 규정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된다. 김수영의 시사적 위치가 대표적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데 주목해보자. 미적 근대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별 이분법을 완성하는 너무나 근대적인 남성 인간이 됨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지 여편네를 때려눕히고 욕을 하고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삼는 정도를 넘어, 그의 개인성, 주체의 완성을 위하여 징발된 타자가 아내라고 볼 때에야 비로소 60년대를 살아낸 시인에게 아내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수영의 근대를 향한 모험은 그의 아내/여편네라는 타자를 빌려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내보내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미적 근대성의 담지자로서 어떤 시인도 여성혐오를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이토록 명료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여성혐오를 넘어 여성과 평등해졌다.

김수영 시인 별세 이듬해인 1969년 &lt;창작과비평&gt; 여름호에 유작으로 발표된 시 ‘이혼 취소’. 맹문재 제공
김수영 시인 별세 이듬해인 1969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유작으로 발표된 시 ‘이혼 취소’. 맹문재 제공

아내여 화해하자

그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시를 썼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그런 한편, 김수영은 일생에 걸쳐 아내와 영위해간 삶을 시로 썼다. 시와 산문 속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인식은 변화한다. 전기 작품의 ‘너’(‘너를 잃고’ 등), ‘뮤즈’에서, 생활의 한덩어리 동반자로 함께 시장통을 걸어가는 호콩 마마콩 무더기 같은 여편네(‘생활’)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적’(‘적 2’ 등)으로, 마침내는 생활의 피 흘리는 고난을 함께하는 동지(‘이혼 취소’)로 변화했다.

김수영의 ‘여편네’가 반드시 아내를 비하하고 욕하기 위해 쓰인 어휘가 아니란 사실은 여러 연구자들이 소상히 밝혀놓았지만, 그럼에도 김수영이 여편네에서 다시 아내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화해를 청한 시를 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리라. 시 ‘이혼 취소’에서 김수영은 빚보증을 선 일을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면서 아내의 속됨이 생활을 위해 피 흘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해를 청한다. 오랜 적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네 얼굴은’과 ‘이혼 취소’ 등 김수영 유고 다섯 편을 &lt;창작과비평&gt;에 싣게 된 정황을 설명한 편집자 주가 보인다. 맹문재 제공
‘네 얼굴은’과 ‘이혼 취소’ 등 김수영 유고 다섯 편을 <창작과비평>에 싣게 된 정황을 설명한 편집자 주가 보인다. 맹문재 제공

요는,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던 것이다. 이 독특한 타자성의 경험이 김수영에게 여성혐오를(동시에 자기혐오를)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한 채로 중단되었다. 김수영은 ‘도중’에 죽었다. 아직 일가를 이루었다 하기엔 젊지만 그가 죽기 전 남긴 시들을 보면 어떤 경지를 향하여 한고비 넘어선 기운도 있다. 그가 영원히 길 위에 있으려던 건지 집을 한채 지으려던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중단됨을 결말로 삼아 독자인 나는 그의 인생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다행히 그는 죽기 전에 아내를 경유하여 여성이라는 존재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 죽음 반 사랑 반의 존재라는 통찰을 남겼다. 당대의 어떤 시인 소설가보다 훨씬 집요하게 ‘여편네’를 탐구한 덕분일 것이다 .

노혜경 시인.
노혜경 시인.

그렇더라도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힌 폭력가장이고 지일에는 창녀를 사는 속물이라는 평가를 김수영이 피해갈 수는 없다. 60년대를 짊어지고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다.

노혜경 시인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15515.html?_fr=mt3#csidx96f7597345bd8b385861fa234c0de5c /book/1015515.html?_fr=mt3#csidx3034aa2b01abc0d84c90521af3b5469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2-01-07 01:59:32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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