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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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딜레마
통일 20년을 맞아 과거 동독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동독에 거주하던 대다수 시민들에게 동독은 어두운 감옥으로 간주되었으며, 서독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동독이 ‘더 좋은 독일 땅’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부정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국가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결함을 덮어 주었다. 동독은 자본의 세력을 극복했고 누구에게나 직장과 아파트를 주었으며 시민들은 대부분 같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19세기, 20세기 사회주의는 많은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사회제도라고 여겨졌다. 자본주의란 냉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사회혼란만 가져온다고 인식되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에 거의 규칙적으로 닥치는 크고 작은 불황은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듯했다. 반대로 사회주의는 국가계획에 의해 안전하고 평화스럽고 물욕을 극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이는 이론에 불과한 이상향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달랐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상향을 그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 알렌스바흐(Allensbach) 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동독시민의 반 수 이상은‘사회주의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단지 실제 운영이 나빴다’는 데 동의했고 서독에서는 30%가 이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를 전적으로 무능한 지도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인물도 계획경제 하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학자는 오스트리아의 미제스 교수였다. 당시 시장경제주의자와 사회주의 경제학자 간에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된 토론에서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합리적인 기업회계가 불가능한 것이 사회주의 체제결함의 관건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초기 마르크스 이론가들은 계획경제 운영에서 실제 부닥칠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문제의 복잡성을 완전히 과소평가한 것이다. 심지어 레닌은 국가경제체제를 우체국을 운영하는 수준으로 여겼다.『국가와 혁명』 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모든 시민은 국가 운영체제에서 노동자나 사무원으로 종사한다며 또 이들의 업무에 대해 용이하게 감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회계와 감독의 문제점은 자본주의자들이 최대한으로 간소화해 놓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신뢰는 좋다. 그러나 감독을 받는 것이 더욱 좋다. (Vertrauen ist gut, aber Kontrolle ist besser!)’는 어구도 나왔다. 독일에서는 속담처럼 일상화된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깔려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레닌은 누구나 감독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회계는 4가지 기본 계산법에만 능하면 충분하다고 과소평가했다. 이때 미제교수는 비엔나에서 소련경제의 혼란상을 보고 있었다. 그의 공격 초점은 사유재산과 이윤의 철폐로 노동인구에 동력 부여가 사라진다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시장이 없으면 현실적인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여러 종류의 상품부족 현상이 일게 된다는 지론을 편 것이다. 국영화 된 기업에서는 자원의 합리적인 투입을 할 수 있기에는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계획자는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현상이 일게 되며 이것이 사회주의의 근본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후 좌파 이론가들 간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새로운 모델로 ‘음지물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 계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시장사회주의 (Marktsozialismus)를 도입하여 일선 기업을 이용한 상품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학자는 꿈 같은 이야기라며 비웃고 있었다. 동독경제의 시련의 연속을 본다. 초기에는 계획경제에서도 강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생산성은 서독에 비해 3분의 1이나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70년 대 초 이미 경제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 울브리히트는 소련에서 개발된 자유주의적인 발상을 도입하려 했다. 이 제도에서는 국가는 주요품목에 대해서만 중앙집권적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부층에서는 국가가 요구하는 생산량이 아니라 이윤 (Gewinn)이 실적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시장경제의 기반이 결여된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매카니즘을 도입하려 한 것이다. 집단소유제도나 국가의 가격책정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경제는 오히려 붕괴단계에 이르렀으며 생산과정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이에 1970년 울브리히트 수상은 모스크바에서 한 연설에서 어느 정도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본주의국가에서 부채를 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표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그 직후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계자 호네커는 개혁의 방향을 다시 거꾸로 돌려 나갔다. 그러면서 국민에게는 소비와 사회안전망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더욱 좀먹어 들어갔으며, 70년 대 오일쇼크를 겪은 후 80년대 초 국제금리가 오르자 부채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수십억에 달하는 서독정부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국가부도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회주의경제는 최종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 비극의 장면은 거의 10년이나 이어졌으며 정치적인 변화가 사회주의라는 실험의 막을 내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유럽리포트*2000]
통일 20년을 맞아 과거 동독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동독에 거주하던 대다수 시민들에게 동독은 어두운 감옥으로 간주되었으며, 서독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동독이 ‘더 좋은 독일 땅’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부정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국가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결함을 덮어 주었다. 동독은 자본의 세력을 극복했고 누구에게나 직장과 아파트를 주었으며 시민들은 대부분 같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19세기, 20세기 사회주의는 많은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사회제도라고 여겨졌다. 자본주의란 냉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사회혼란만 가져온다고 인식되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에 거의 규칙적으로 닥치는 크고 작은 불황은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듯했다. 반대로 사회주의는 국가계획에 의해 안전하고 평화스럽고 물욕을 극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이는 이론에 불과한 이상향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달랐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상향을 그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 알렌스바흐(Allensbach) 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동독시민의 반 수 이상은‘사회주의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단지 실제 운영이 나빴다’는 데 동의했고 서독에서는 30%가 이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를 전적으로 무능한 지도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인물도 계획경제 하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학자는 오스트리아의 미제스 교수였다. 당시 시장경제주의자와 사회주의 경제학자 간에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된 토론에서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합리적인 기업회계가 불가능한 것이 사회주의 체제결함의 관건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초기 마르크스 이론가들은 계획경제 운영에서 실제 부닥칠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문제의 복잡성을 완전히 과소평가한 것이다. 심지어 레닌은 국가경제체제를 우체국을 운영하는 수준으로 여겼다.『국가와 혁명』 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모든 시민은 국가 운영체제에서 노동자나 사무원으로 종사한다며 또 이들의 업무에 대해 용이하게 감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회계와 감독의 문제점은 자본주의자들이 최대한으로 간소화해 놓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신뢰는 좋다. 그러나 감독을 받는 것이 더욱 좋다. (Vertrauen ist gut, aber Kontrolle ist besser!)’는 어구도 나왔다. 독일에서는 속담처럼 일상화된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깔려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레닌은 누구나 감독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회계는 4가지 기본 계산법에만 능하면 충분하다고 과소평가했다. 이때 미제교수는 비엔나에서 소련경제의 혼란상을 보고 있었다. 그의 공격 초점은 사유재산과 이윤의 철폐로 노동인구에 동력 부여가 사라진다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시장이 없으면 현실적인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여러 종류의 상품부족 현상이 일게 된다는 지론을 편 것이다. 국영화 된 기업에서는 자원의 합리적인 투입을 할 수 있기에는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계획자는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현상이 일게 되며 이것이 사회주의의 근본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후 좌파 이론가들 간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새로운 모델로 ‘음지물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 계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시장사회주의 (Marktsozialismus)를 도입하여 일선 기업을 이용한 상품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학자는 꿈 같은 이야기라며 비웃고 있었다. 동독경제의 시련의 연속을 본다. 초기에는 계획경제에서도 강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생산성은 서독에 비해 3분의 1이나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70년 대 초 이미 경제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 울브리히트는 소련에서 개발된 자유주의적인 발상을 도입하려 했다. 이 제도에서는 국가는 주요품목에 대해서만 중앙집권적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부층에서는 국가가 요구하는 생산량이 아니라 이윤 (Gewinn)이 실적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시장경제의 기반이 결여된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매카니즘을 도입하려 한 것이다. 집단소유제도나 국가의 가격책정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경제는 오히려 붕괴단계에 이르렀으며 생산과정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이에 1970년 울브리히트 수상은 모스크바에서 한 연설에서 어느 정도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본주의국가에서 부채를 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표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그 직후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계자 호네커는 개혁의 방향을 다시 거꾸로 돌려 나갔다. 그러면서 국민에게는 소비와 사회안전망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더욱 좀먹어 들어갔으며, 70년 대 오일쇼크를 겪은 후 80년대 초 국제금리가 오르자 부채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수십억에 달하는 서독정부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국가부도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회주의경제는 최종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 비극의 장면은 거의 10년이나 이어졌으며 정치적인 변화가 사회주의라는 실험의 막을 내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유럽리포트*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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