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통일과 통일비용에 무관심했던 독일
페이지 정보

본문
10. 통일과 통일비용에 무관심했던 독일
서독정부는 동독의 경제력에 무관심
통일 전 냉전 시 서독에서는 ‘통일’이란 단어는 자주 거론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의 가능성이란 전적으로 전승국의 영향력에 달려 있으므로 국제 정치적인 변화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해되었으므로 동독 정권은 ‘통일’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통일론자는 2차 대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주의자 (Revanchist)라는 선전공세에 막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단어 사용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통일’을 사용할 때는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되어 풍기는 어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단어의 어원은 ‘하나’(ein)이며 이 단어를 동사화한것이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은 동적이며 능동적인 단어이다. 그런 이유에서 반드시 ‘통일’을 논할 때는 오히려 ‘Einheit’ 가 사용되었다. 이는 순간의 정적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라는 단어를 ‘하나임, 통일’로 명사화한 정적인 단어이다.
그만큼 ‘통일’은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은 흡수통일 즉 보복적인 무력을 전제된 것이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담론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독 정계를 볼 때 보수계에서 일부 미미하게 통일을 논했을 뿐, 좌파나 동독정권자는 통일을 거부해 왔으며 통일이 담론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통일에 필연적으로 따르게될 자기의 권력상실에 대해 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활을 건 정치목표는 동독정권의 외교적인 인정에 두었다.
서독 정부에는 ‘통일부’라는 부서도 없었다. ‘독일국내문제 부’(Ministerium fuer Innerdeutsche Angelegenheiten)가 있을 뿐이었다. 서독정부에는 통일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통일보다 더욱 절실하며 시급한 과제는 장벽으로 동서독에 갈라진 부모형제간의 상호방문이나 개인적인 생필품지원 같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통일을 전제로 하는 일체의 활동은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만 내세우는 ‘통일’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유세계의 진면모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요즘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비용’ 같은 사항은 정계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통일비용에 대한 무관심은 차치하고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동독 경제현실에 대해 너무나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동독경제가 낙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독을 다녀온 시민들이 사정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통독 후 나타난 동독의 실상은 너무나 놀라웠다. 동독경제의 실상은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몰락직전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서독측에서는 자기 형제 국가인 동독의 경제사정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 학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산권은 원래 국내 모든 사항에 대해 대외 비밀로 했다. 그러나 1970년에 200만 명이 그리고 1973년에는 800 만 명이 동독을 왕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독측의 직무태만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동독의 경제력
동독경제의 비참한 정도가 국가의 존폐를 염려할만한 수준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이러한 심각성을 은폐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독의 정계나 학계에서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통일 후의 충격과 당혹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점은 따른다. 만약에 연구기관이나 서독의 정부기관이 동독경제에 대한 자료수입을 시도했다면 ’일급비밀사항’에 저촉되어 동서독간에 정치문제로까지 커졌을 것이다.
동독의 경제력에 대해서는 80년대 한 때 세계 11번 순위라는 보도가 널리 알려졌었다.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모든 공산권 중에서 역시 독일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 랭킹은 동독이 받아드린 대외차관을 반영하면서 이를 근거로 한 잘못된 통계였던 것으로 통일 후 알려졌다. 서방세계를 대표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전문기관의 통계마저 이 정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통일 후 외부에 드러난 동독경제의 후진성은 놀라웠다.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냉전시 동독정권은 서독인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동독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동독정부는 이 통행료를 톡톡히 받아냈다. 일부는 서독정부로 하여금 아우토반 건설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일반 도로사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감을 금치 못하게 했다. 지방으로 가면 히틀러 시대 도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국유화된 아파트 역시 수 십 년을 수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에너지는 만성적으로 부족했고 전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요 권력층 근무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했다. 2기통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출생신고와 동시에 구매신청을 한다는 우스개 말이 돌았다.
투자를 하지 못한 생산공장들은 2차 대전 당시 수준의 상품을 생산했으며 화학공장 역시 히틀러 시대 기술과 시설을 사용했다. 공장에서 시설보수에 소요된 인원이 생산직 인원을 능가했다. 게다가 환경 오염해결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통일 직후부터 독일정부는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성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거의 폐허화 된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놓은 셈이다. 지금의 동독은 전국이 깨끗하고 현대적으로 단장된 전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의 투자결과 통일 직후 약 3, 4년간 독일은 전에 없는 호경기를 맞을 정도였다. 이는 통일에 의한 반짝 경기였다. 그러나 통일 8년 후인 98년에 이미 EU의 모든 나라가 독일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태리, 홀란드, 영국 등 수 십 년 간 독일에 많이 뒤지던 국가들이 독일을 추월했고, 이제는 이태리, 스페인, 폴투갈 과 구 공산권 국가만이 독일을 추격중이다. 그나마 이태리는 현재 독일과 거의 같은 수준에 달했으며 스페인은 4년 후면 독일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놀라운 보도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경제대국이던 독일경제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경제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독일 내부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의 부재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오히려 독일이 통일비용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을 경제불황의 주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관계는 정계나 학계가 당연히 관심을 갖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에서는 소위 ‘통일비용’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태다.
그나마 지금까지 알려진 연구결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현직 장관으로 동독지역 경제복구 책임을 맡고 있는 스톨페 장관에 의하면 연간 180억 유로가 연방정부에서 동독지역으로 투입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전체 통일비용 규모는 2500억 유로라고 주장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슈뢰더 박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은 동독지역 시민의 일반적인 생각 즉 통일에 의해 서독에는 추가 비용부담이 거의 없었다는 통념을 부추기면서 실제 통일비용을 은폐하려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학계의 결과는 구동독 할레 (Halle)시에 있는 경제연구소에서 있었다. 여기서는 통일 부담금으로 1990년에서 2004년까지 1조 5천 억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 액수에서 동독이 지불하는 세금을 감해야 실제 지원액수가 나온다. 이 계산은 매우 복잡하다고 한다. 여기서 8-10%라는 세금을 제하면 실제 지원금은 1조 2천억 정도로 본다.
2003년도 동독지원금만을 보면 1000억 유로에 달한다. 문제는 이 액수와 위에 지적한 스톨페 장관의 발표 즉 180억 유로라는 액수와는 5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의 발표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동떨어진 산출방식에 근거를 두었다고 반박한다.
독일정부는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미화 (Schoenfaerberei)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력의 상승으로 나타나는 수치는 동독지역의 실제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서독의 지원금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정부는 동서독간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점 역시 할레연구소는 반박하고 있다.
경제인들은 동독경제가 속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통한 지원이 따라야 했는데, 정부는 동독인들이 성급히 생활수준을 서독수준으로 향상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사회복지금으로 자본이 동독지역으로 전입된 것이 과오였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동독인들은 전형적인 ‘기초생활수급자’적 멘탈리티만 더욱 조장되었다고 슈뢰더 박사는 말한다. 통일시 동서독 화폐를 1:1로 교환해 주었듯이 사회보장제도 역시 1:1로 동독인에게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취업자와 사회보장수급자간에 수입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위에 지적했듯이 통일비용 산출은 정부와 학계간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통일부담액을 줄여서 발표하는 것은 동서독인간의 시기심 같은 위화감 조성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정부가 통일비용에 대한 신뢰성있는 진지한 연구를 지원하여 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일이 학자의 기본임무라고 강조한다. EU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0 여 년간 독일경제가 겪은 저성장의 원인은 직접간접으로 동독경제 지원의 목적으로 돈을 투입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독일정부는 유럽 최하위권 경제 성장률과 통일비용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핵심을 도외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일은 이루어졌어야 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실패작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적어도 잠정적인 과도기를 두었어야 했다는 진단이다. 아직도 국민총생산의 5%가 동독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원자금이며, 동독은 자체 수요의 2/3만을 직접 생산하고 있다. 서독측은 경제에 따르게 될 문제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통일부담액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정부나 학
계가 신뢰감이 가는 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간다. [유럽리포트*2005]
서독정부는 동독의 경제력에 무관심
통일 전 냉전 시 서독에서는 ‘통일’이란 단어는 자주 거론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의 가능성이란 전적으로 전승국의 영향력에 달려 있으므로 국제 정치적인 변화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해되었으므로 동독 정권은 ‘통일’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통일론자는 2차 대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주의자 (Revanchist)라는 선전공세에 막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단어 사용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통일’을 사용할 때는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되어 풍기는 어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단어의 어원은 ‘하나’(ein)이며 이 단어를 동사화한것이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은 동적이며 능동적인 단어이다. 그런 이유에서 반드시 ‘통일’을 논할 때는 오히려 ‘Einheit’ 가 사용되었다. 이는 순간의 정적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라는 단어를 ‘하나임, 통일’로 명사화한 정적인 단어이다.
그만큼 ‘통일’은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은 흡수통일 즉 보복적인 무력을 전제된 것이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담론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독 정계를 볼 때 보수계에서 일부 미미하게 통일을 논했을 뿐, 좌파나 동독정권자는 통일을 거부해 왔으며 통일이 담론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통일에 필연적으로 따르게될 자기의 권력상실에 대해 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활을 건 정치목표는 동독정권의 외교적인 인정에 두었다.
서독 정부에는 ‘통일부’라는 부서도 없었다. ‘독일국내문제 부’(Ministerium fuer Innerdeutsche Angelegenheiten)가 있을 뿐이었다. 서독정부에는 통일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통일보다 더욱 절실하며 시급한 과제는 장벽으로 동서독에 갈라진 부모형제간의 상호방문이나 개인적인 생필품지원 같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통일을 전제로 하는 일체의 활동은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만 내세우는 ‘통일’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유세계의 진면모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요즘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비용’ 같은 사항은 정계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통일비용에 대한 무관심은 차치하고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동독 경제현실에 대해 너무나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동독경제가 낙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독을 다녀온 시민들이 사정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통독 후 나타난 동독의 실상은 너무나 놀라웠다. 동독경제의 실상은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몰락직전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서독측에서는 자기 형제 국가인 동독의 경제사정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 학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산권은 원래 국내 모든 사항에 대해 대외 비밀로 했다. 그러나 1970년에 200만 명이 그리고 1973년에는 800 만 명이 동독을 왕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독측의 직무태만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동독의 경제력
동독경제의 비참한 정도가 국가의 존폐를 염려할만한 수준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이러한 심각성을 은폐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독의 정계나 학계에서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통일 후의 충격과 당혹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점은 따른다. 만약에 연구기관이나 서독의 정부기관이 동독경제에 대한 자료수입을 시도했다면 ’일급비밀사항’에 저촉되어 동서독간에 정치문제로까지 커졌을 것이다.
동독의 경제력에 대해서는 80년대 한 때 세계 11번 순위라는 보도가 널리 알려졌었다.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모든 공산권 중에서 역시 독일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 랭킹은 동독이 받아드린 대외차관을 반영하면서 이를 근거로 한 잘못된 통계였던 것으로 통일 후 알려졌다. 서방세계를 대표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전문기관의 통계마저 이 정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통일 후 외부에 드러난 동독경제의 후진성은 놀라웠다.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냉전시 동독정권은 서독인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동독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동독정부는 이 통행료를 톡톡히 받아냈다. 일부는 서독정부로 하여금 아우토반 건설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일반 도로사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감을 금치 못하게 했다. 지방으로 가면 히틀러 시대 도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국유화된 아파트 역시 수 십 년을 수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에너지는 만성적으로 부족했고 전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요 권력층 근무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했다. 2기통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출생신고와 동시에 구매신청을 한다는 우스개 말이 돌았다.
투자를 하지 못한 생산공장들은 2차 대전 당시 수준의 상품을 생산했으며 화학공장 역시 히틀러 시대 기술과 시설을 사용했다. 공장에서 시설보수에 소요된 인원이 생산직 인원을 능가했다. 게다가 환경 오염해결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통일 직후부터 독일정부는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성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거의 폐허화 된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놓은 셈이다. 지금의 동독은 전국이 깨끗하고 현대적으로 단장된 전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의 투자결과 통일 직후 약 3, 4년간 독일은 전에 없는 호경기를 맞을 정도였다. 이는 통일에 의한 반짝 경기였다. 그러나 통일 8년 후인 98년에 이미 EU의 모든 나라가 독일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태리, 홀란드, 영국 등 수 십 년 간 독일에 많이 뒤지던 국가들이 독일을 추월했고, 이제는 이태리, 스페인, 폴투갈 과 구 공산권 국가만이 독일을 추격중이다. 그나마 이태리는 현재 독일과 거의 같은 수준에 달했으며 스페인은 4년 후면 독일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놀라운 보도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경제대국이던 독일경제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경제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독일 내부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의 부재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오히려 독일이 통일비용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을 경제불황의 주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관계는 정계나 학계가 당연히 관심을 갖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에서는 소위 ‘통일비용’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태다.
그나마 지금까지 알려진 연구결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현직 장관으로 동독지역 경제복구 책임을 맡고 있는 스톨페 장관에 의하면 연간 180억 유로가 연방정부에서 동독지역으로 투입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전체 통일비용 규모는 2500억 유로라고 주장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슈뢰더 박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은 동독지역 시민의 일반적인 생각 즉 통일에 의해 서독에는 추가 비용부담이 거의 없었다는 통념을 부추기면서 실제 통일비용을 은폐하려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학계의 결과는 구동독 할레 (Halle)시에 있는 경제연구소에서 있었다. 여기서는 통일 부담금으로 1990년에서 2004년까지 1조 5천 억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 액수에서 동독이 지불하는 세금을 감해야 실제 지원액수가 나온다. 이 계산은 매우 복잡하다고 한다. 여기서 8-10%라는 세금을 제하면 실제 지원금은 1조 2천억 정도로 본다.
2003년도 동독지원금만을 보면 1000억 유로에 달한다. 문제는 이 액수와 위에 지적한 스톨페 장관의 발표 즉 180억 유로라는 액수와는 5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의 발표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동떨어진 산출방식에 근거를 두었다고 반박한다.
독일정부는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미화 (Schoenfaerberei)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력의 상승으로 나타나는 수치는 동독지역의 실제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서독의 지원금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정부는 동서독간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점 역시 할레연구소는 반박하고 있다.
경제인들은 동독경제가 속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통한 지원이 따라야 했는데, 정부는 동독인들이 성급히 생활수준을 서독수준으로 향상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사회복지금으로 자본이 동독지역으로 전입된 것이 과오였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동독인들은 전형적인 ‘기초생활수급자’적 멘탈리티만 더욱 조장되었다고 슈뢰더 박사는 말한다. 통일시 동서독 화폐를 1:1로 교환해 주었듯이 사회보장제도 역시 1:1로 동독인에게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취업자와 사회보장수급자간에 수입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위에 지적했듯이 통일비용 산출은 정부와 학계간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통일부담액을 줄여서 발표하는 것은 동서독인간의 시기심 같은 위화감 조성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정부가 통일비용에 대한 신뢰성있는 진지한 연구를 지원하여 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일이 학자의 기본임무라고 강조한다. EU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0 여 년간 독일경제가 겪은 저성장의 원인은 직접간접으로 동독경제 지원의 목적으로 돈을 투입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독일정부는 유럽 최하위권 경제 성장률과 통일비용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핵심을 도외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일은 이루어졌어야 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실패작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적어도 잠정적인 과도기를 두었어야 했다는 진단이다. 아직도 국민총생산의 5%가 동독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원자금이며, 동독은 자체 수요의 2/3만을 직접 생산하고 있다. 서독측은 경제에 따르게 될 문제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통일부담액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정부나 학
계가 신뢰감이 가는 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간다. [유럽리포트*2005]
- 다음글9. 동독은 불법국가인가? 21.06.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