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헌의 전원일기](14)봄의 끝물 허망한 꿈…괜찮다, 5월은 또 오고 내 진짜 꿈은 살아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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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벌을 유혹하는 방법은 빛깔이라는데 향기는 사람을 위한 걸까. 아카시아 향이 진동한다. 다른 꽃과 다르게 아카시아는 기분 좋은 추억을 소환한다. 어릴 적 동네 뒷산에서 꽃 덩어리 훑어 먹던 기억, 아카시아라는 이름의 껌과 노래, 막연한 연애 시절의 느낌 따위들. 가슴으로 아파하고 꿈으로 치유하던 시절이다.
덩달아 낮은 곳에선 하얀 찔레꽃이 지천이다. 송홧가루 줄어들고 아카시아도 꽃을 떨구니 곧 밤꽃이 상공을 지배할 거다. 꽃 모양은 기억에 없지만 냄새만은 두텁다. 아카시아 향이 아름다웠던 시절 연인의 향이라면, 밤꽃 냄새는 우중충한 중년 남성의 방구석을 떠오르게 한다. 억울하게도 아카시아는 향인데, 밤꽃은 냄새다. 향내 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고구마 두둑 앞의 나한테선 땀 냄새만 풍긴다. 꿈도 흐릿한 냄새 나는 중년.
시간은 참 무례하고 무자비하다. 그냥 스쳐가도 되는지, 점점 빨리 흘러도 되는지 언제 한 번 물어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쫓아가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뺀다. 뒤처진 사람에게는 그 정도에 비례하는 페널티를 준다. 적어도 뭔가를 포기하거나 몸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봐주질 않는다. 참 매정하다. 나는 대체로 시간에게 서운한 편이다. 사는 내내 그랬다.
간전댁 할머니 ⓒ원유헌
간전댁 할머니 ⓒ원유헌
고사리 끊어 말려주시는 간전댁
“받으시라” “못 받는다”
반복되는 실랑이, 늘 내가 진다
고구마 순을 준비해 놓고는 밭을 미처 다 만들지 못해 몸이 달았다. “내가 하는 일의 소요시간은 항상 예상의 두 배”라고 했더니 아내는 바로 “세 배”라고 수정했다. 농사 10년 차면 뭐 하나. 속도는 붙질 않는다.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다. 속도는 상대적인 빠르기의 단위이다. 즉 시간당 진행되는 물리적 양을 말한다. 내가 아무리 일을 못하는 쪽이라고 해도 10년이면 좀 나아졌으리라 짐작한다. 문제는 시간.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흐르니 속도가 늘지 않는 것이다. 억울함이 좀 풀린다.
두둑 만드는 작업을 끝내고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앞서 농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간전댁할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어제 저녁에 할머니가 전화하셨다.
“고사리 괜찮으까요?”
“내일은 제가 농장에서 일할 시간이 없어요. 모레 아침에 모시고 갈게요.”
할머니는 우리 농장에서 나는 고사리를 끊어서 삶아 말려 주신다. 고사리만은 할머니의 수입으로 치고 몇 년간 해오셨는데 정산할 때마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 돈 못 받아요!”
“그럼 저 나쁜 놈 만드실래요? 저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하시게요?
“누가 선재아빠 보고 그란대요. 그 사람이 나뿐 사람이그마.”
한 농부가 모내기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원유헌
한 농부가 모내기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원유헌
매년 반복되는 승부에서 이긴 적이 없다. 변칙을 택해야 한다. 할머니 신발 사실 때는 안 됐는지, 겨울에 교회 가실 때 차림은 어떠신지, 할머니 밭에 퇴비는 몇 포대 채워 놓을지, 나도 모자라지 않게 해드려야 죄책감이 덜하다. 문제는 오늘은 안 되니 내일 가시자고 해도 당신 생각이 아니면 나한테는 알겠다고 하시고선 농장에 잠입하시는 일이 잦았다. 이날도 불안했다. 그리고 촉이 맞았다.
할머니는 고사리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언덕을 내려오고 계셨다. 차를 세우고 앞을 가로막아도 노고단 쪽만 보면서 나를 알아채시지 못했다. “할머니!” 소리지르자 멈칫하시더니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웃으셨다. 가끔 할머니가 귀엽다. 할머니의 연세는 여든 일곱이다.
“쩌 노고단이 노랗구마요. 송홧가리가 안적 날려요.”
할머니 특유의 딴소리로 넘어가기 시전이다. 말이 필요 없다. 얼른 차로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 나도 화가 난 척 아무 말씀도 안 드렸다. 할머니는 집에 다 와서야 한 말씀 하셨다.
“새복(새벽)에 인났는디 시간이 안 가요. 걍 슬슬 걸어서 강께 농장입디다. 고사리 끊으니 시간이 후딱 가느마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죄송스럽지만 끝까지 표정관리에 매진했다. 짐이랑 고사리 내려드리고 나서는데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인자 혼자 안 가요. 걱정 말아요. 인자 안 가께요.”
목례만 하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효과는 봤지만 마음이 안 좋아 농장 근처를 걸었다. 여느 때처럼 ‘내가 좀 더 부지런 떨면 될 텐데’ 하는 반성으로 끝났다. 늘어진 아카시아 꽃을 훑어 입으로 우겨 넣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네는 참 희한한 스타일이야. 약간 자학 성향이 있는 것 같아.”
구례에 처음 내려왔을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하는 농사의 방식이 다품종 소량생산, 흔히 말하는 소농 방식인 게 안타까워하는 소리다. 한 가지 품종을 대량 생산해야 돈을 번다는 건 동서고금으로 옳은 말이다.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던 터라 내가 왜 그러고 사는지 잘 알면서도 만날 때마다 하는 소리다.
“많이는 못 벌어도 크게 망할 일 없어.”
똑같은 대답에 그는 신경도 안 썼다. 친구는 국밥집 TV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고 한마디 했다.
“참 쟈는 예쁜 척 안 해서 좋아.”
평균 점수 이하의 안면 소유자로서 그 말이 거슬렸다. 예쁜 척 안 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예쁘다는 말이다. 예쁜 척 안 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다. 잘생긴 것들의 특권이다. 못생긴 사람이 예쁜 척 안 한다고 예쁘다고 하겠나. 생긴 대로라고 하겠지. 못생긴 사람들은 예쁜 척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못생긴 척도 할 수 없다. 그냥 못생긴 채로 사는 거다. ‘연기력 논란’은 예쁘다는 뜻이고 ‘연기파 배우’라는 말은 인물이 모자란다는 얘기다. TV에서는 어떻게 해도 예쁜 배우가 탐스럽게 뭔가를 먹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니 화가 났다.
“근데 사람들은 저런 먹방을 왜 보는 거야? 남들 입으로 들어가는 거 보면 배만 고프잖아.”
“자넨 꼭 자네 입으로 들어가야 속이 시원헌가? 쩌그 노고단이 자네 것이었으믄 좋겄어?”
친구는 자기가 말하고도 비유가 적절했다고 느꼈는지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
“산이야 보고만 있어도 좋지. 근데 남들 먹는 걸 보면 몸이 반응을 해. 미치겠어. 속이 뒤틀려.”
“자네 내려온 지 한 10년 됐제? 늙었구마. 시간 없어. 밥이나 묵어.”
못자리에 모판넣기 작업을 끝내고 흙탕물에 손을 씻고 있다. 희한하게도 손이 많이 깨끗해진다. 뒤이어 옷에 손을 문질러 마무리한다. ⓒ원유헌
못자리에 모판넣기 작업을 끝내고 흙탕물에 손을 씻고 있다. 희한하게도 손이 많이 깨끗해진다. 뒤이어 옷에 손을 문질러 마무리한다. ⓒ원유헌
고구마 밭에서 꾼 생생한 꿈
섬진강 주변이 온통 똥바다 되는
길몽 놓칠세라 처음 산 복권
낮에 먹은 아카시아 꽃이
욕심과 환상을 한방에 깨버렸다
순댓국이 나왔다. 몸도 마음도 가라앉았다. ‘늙었구마’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이다. 그 친구의 말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늙었다는 뜻이기에 슬펐다. 늘 꿈을 품고 살았고 귀농으로 그 꿈을 이뤘다. 그다음에 꿈이 없어졌다. 누가 물으면 없는 듯 살다가 없었던 듯 가는 거라고 얘기는 한다. 그게 꿈은 아니다. 아직 농부라고 자칭하기 부족하니 사실은 꿈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봄의 끝물에 춘곤증은 여전했다. 고구마 밭에 차를 세우고 잠이 들었다. 좀처럼 꿈을 안 꾸는 편인데 깨고 나서도 내용이 선명했다. 섬진강을 거슬러 노란 토네이도가 몰아 닥치고 급기야 온 주변이 황금색 똥바다로 변하는 내용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기억은 또렷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색은 생시에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기로 오물을 뒤집어쓰는 꿈은 길몽이라고 했다. 농사 지으면서 횡재할 일이 없으니 이건 로또를 사라는 계시가 분명했다. 한번도 내 돈 주고 내 발로 복권을 사러 간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천명이니 어겨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준엄한 자세로 고구마 밭에 섰다. 날이 더웠지만 문제 될 것이 없다. 나는 곧 로또에 당첨될 사람이다. 태양을 마주하고 일을 해 나갔다. 해를 대하는 자세는 등지는 것보다 정면이 좋다. 특히 앉아서 밭을 매거나 괭이질할 때 그렇다. 챙이 큰 모자가 머리를 가려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고개와 상체도 숙이게 되니 몸의 일부도 가린다. 반대로 돌아서면 오히려 등짝이 타 들어간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해를 정면으로 대할 때 그림자의 면적이 더 작아지고 그 대부분은 모자의 몫이다.
“살포기 빌려 간 것 좀 갖고 오이라. 약속 없으믄 밥 먹고 가고.”
“그랴, 서두르지 말어
횡재 바라고 뎀비다가 피똥 싸”
장씨 아저씨의 말은 죽비다
일이 끝나갈 때쯤 장씨아저씨가 전화하셨다. 마침 살포기도 트럭에 싣고 온 참이었다. 밥도 주신단다. 뭔가 착착 맞아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가는 길에 로또 복권을 샀다. 욕심부리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2등 정도만 돼도 만족하리라 주문을 외웠다.
“이젠 농사가 뭔지 좀 알겄는가? 자네도 인자 10년 돼 가잖어.”
“예, 조금씩 알아가는 중인 것 같네요.”
“그랴. 서두르지 말어. 농사로 돈 모을 생각 말고. 애먼 정부지원 같은 거 받아서 뭐 지을 생각도 말고. 횡재 바라고 뎀비다가 피똥 싸는 놈덜 많응게. 근디 어디서 아카시아 냄새 겉은 게 난다?”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데 배가 살살 아파왔다. 낮에 한 줌 쥐어 먹은 아카시아 꽃이 문제가 됐다. 점점 배 속이 부글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방귀를 조금씩 살포하면서 압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는데 이런. 마지막 방귀는 기체가 아니었다. 몸이 굳고 숨이 멎었다. 아저씨께 급한 일을 깜빡했다고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말씀드리고 일어섰다.
어렵게 차에 올라 등과 허벅지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살짝 든 자세로 운전을 했다. 창문을 다 열어도 향기 아닌 냄새는 길게 진동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강렬했던 한낮의 꿈도 길몽이 아닌 예지몽이었다. 아카시아 한 방에 꿈도 추억도 날아갔다. 더 이상 내게 아카시아는 연애 시절 달콤한 추억의 향기가 아니다. 욕심과 환상을 깨 주는 각성제로 업그레이드됐다.
꿈은 계속 유지할란다. 형태만 만들었지 아직 내용을 채우진 못했다. 숫자 한 개도 안 맞는 복권은 안 살란다. 일확천금은 없을뿐더러 어쩌다 찾아온 횡재에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리고 다행이다. 달콤한 꽃 향기로 추억하던 연애 감정의 취기는 날아갔지만 맨 정신을 얻었다. 매년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나는 이제 정신이 말짱해질 예정이다.
▶필자 원유헌
[원유헌의 전원일기](14)봄의 끝물 허망한 꿈…괜찮다, 5월은 또 오고 내 진짜 꿈은 살아있으니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212230005&code=100100#csidx90ebd5bd7677dc6a6f03100023f2206
덩달아 낮은 곳에선 하얀 찔레꽃이 지천이다. 송홧가루 줄어들고 아카시아도 꽃을 떨구니 곧 밤꽃이 상공을 지배할 거다. 꽃 모양은 기억에 없지만 냄새만은 두텁다. 아카시아 향이 아름다웠던 시절 연인의 향이라면, 밤꽃 냄새는 우중충한 중년 남성의 방구석을 떠오르게 한다. 억울하게도 아카시아는 향인데, 밤꽃은 냄새다. 향내 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고구마 두둑 앞의 나한테선 땀 냄새만 풍긴다. 꿈도 흐릿한 냄새 나는 중년.
시간은 참 무례하고 무자비하다. 그냥 스쳐가도 되는지, 점점 빨리 흘러도 되는지 언제 한 번 물어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쫓아가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뺀다. 뒤처진 사람에게는 그 정도에 비례하는 페널티를 준다. 적어도 뭔가를 포기하거나 몸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봐주질 않는다. 참 매정하다. 나는 대체로 시간에게 서운한 편이다. 사는 내내 그랬다.
간전댁 할머니 ⓒ원유헌
간전댁 할머니 ⓒ원유헌
고사리 끊어 말려주시는 간전댁
“받으시라” “못 받는다”
반복되는 실랑이, 늘 내가 진다
고구마 순을 준비해 놓고는 밭을 미처 다 만들지 못해 몸이 달았다. “내가 하는 일의 소요시간은 항상 예상의 두 배”라고 했더니 아내는 바로 “세 배”라고 수정했다. 농사 10년 차면 뭐 하나. 속도는 붙질 않는다.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다. 속도는 상대적인 빠르기의 단위이다. 즉 시간당 진행되는 물리적 양을 말한다. 내가 아무리 일을 못하는 쪽이라고 해도 10년이면 좀 나아졌으리라 짐작한다. 문제는 시간.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흐르니 속도가 늘지 않는 것이다. 억울함이 좀 풀린다.
두둑 만드는 작업을 끝내고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앞서 농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간전댁할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어제 저녁에 할머니가 전화하셨다.
“고사리 괜찮으까요?”
“내일은 제가 농장에서 일할 시간이 없어요. 모레 아침에 모시고 갈게요.”
할머니는 우리 농장에서 나는 고사리를 끊어서 삶아 말려 주신다. 고사리만은 할머니의 수입으로 치고 몇 년간 해오셨는데 정산할 때마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 돈 못 받아요!”
“그럼 저 나쁜 놈 만드실래요? 저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하시게요?
“누가 선재아빠 보고 그란대요. 그 사람이 나뿐 사람이그마.”
한 농부가 모내기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원유헌
한 농부가 모내기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원유헌
매년 반복되는 승부에서 이긴 적이 없다. 변칙을 택해야 한다. 할머니 신발 사실 때는 안 됐는지, 겨울에 교회 가실 때 차림은 어떠신지, 할머니 밭에 퇴비는 몇 포대 채워 놓을지, 나도 모자라지 않게 해드려야 죄책감이 덜하다. 문제는 오늘은 안 되니 내일 가시자고 해도 당신 생각이 아니면 나한테는 알겠다고 하시고선 농장에 잠입하시는 일이 잦았다. 이날도 불안했다. 그리고 촉이 맞았다.
할머니는 고사리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언덕을 내려오고 계셨다. 차를 세우고 앞을 가로막아도 노고단 쪽만 보면서 나를 알아채시지 못했다. “할머니!” 소리지르자 멈칫하시더니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웃으셨다. 가끔 할머니가 귀엽다. 할머니의 연세는 여든 일곱이다.
“쩌 노고단이 노랗구마요. 송홧가리가 안적 날려요.”
할머니 특유의 딴소리로 넘어가기 시전이다. 말이 필요 없다. 얼른 차로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 나도 화가 난 척 아무 말씀도 안 드렸다. 할머니는 집에 다 와서야 한 말씀 하셨다.
“새복(새벽)에 인났는디 시간이 안 가요. 걍 슬슬 걸어서 강께 농장입디다. 고사리 끊으니 시간이 후딱 가느마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죄송스럽지만 끝까지 표정관리에 매진했다. 짐이랑 고사리 내려드리고 나서는데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인자 혼자 안 가요. 걱정 말아요. 인자 안 가께요.”
목례만 하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효과는 봤지만 마음이 안 좋아 농장 근처를 걸었다. 여느 때처럼 ‘내가 좀 더 부지런 떨면 될 텐데’ 하는 반성으로 끝났다. 늘어진 아카시아 꽃을 훑어 입으로 우겨 넣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네는 참 희한한 스타일이야. 약간 자학 성향이 있는 것 같아.”
구례에 처음 내려왔을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하는 농사의 방식이 다품종 소량생산, 흔히 말하는 소농 방식인 게 안타까워하는 소리다. 한 가지 품종을 대량 생산해야 돈을 번다는 건 동서고금으로 옳은 말이다.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던 터라 내가 왜 그러고 사는지 잘 알면서도 만날 때마다 하는 소리다.
“많이는 못 벌어도 크게 망할 일 없어.”
똑같은 대답에 그는 신경도 안 썼다. 친구는 국밥집 TV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고 한마디 했다.
“참 쟈는 예쁜 척 안 해서 좋아.”
평균 점수 이하의 안면 소유자로서 그 말이 거슬렸다. 예쁜 척 안 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예쁘다는 말이다. 예쁜 척 안 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다. 잘생긴 것들의 특권이다. 못생긴 사람이 예쁜 척 안 한다고 예쁘다고 하겠나. 생긴 대로라고 하겠지. 못생긴 사람들은 예쁜 척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못생긴 척도 할 수 없다. 그냥 못생긴 채로 사는 거다. ‘연기력 논란’은 예쁘다는 뜻이고 ‘연기파 배우’라는 말은 인물이 모자란다는 얘기다. TV에서는 어떻게 해도 예쁜 배우가 탐스럽게 뭔가를 먹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니 화가 났다.
“근데 사람들은 저런 먹방을 왜 보는 거야? 남들 입으로 들어가는 거 보면 배만 고프잖아.”
“자넨 꼭 자네 입으로 들어가야 속이 시원헌가? 쩌그 노고단이 자네 것이었으믄 좋겄어?”
친구는 자기가 말하고도 비유가 적절했다고 느꼈는지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
“산이야 보고만 있어도 좋지. 근데 남들 먹는 걸 보면 몸이 반응을 해. 미치겠어. 속이 뒤틀려.”
“자네 내려온 지 한 10년 됐제? 늙었구마. 시간 없어. 밥이나 묵어.”
못자리에 모판넣기 작업을 끝내고 흙탕물에 손을 씻고 있다. 희한하게도 손이 많이 깨끗해진다. 뒤이어 옷에 손을 문질러 마무리한다. ⓒ원유헌
못자리에 모판넣기 작업을 끝내고 흙탕물에 손을 씻고 있다. 희한하게도 손이 많이 깨끗해진다. 뒤이어 옷에 손을 문질러 마무리한다. ⓒ원유헌
고구마 밭에서 꾼 생생한 꿈
섬진강 주변이 온통 똥바다 되는
길몽 놓칠세라 처음 산 복권
낮에 먹은 아카시아 꽃이
욕심과 환상을 한방에 깨버렸다
순댓국이 나왔다. 몸도 마음도 가라앉았다. ‘늙었구마’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이다. 그 친구의 말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늙었다는 뜻이기에 슬펐다. 늘 꿈을 품고 살았고 귀농으로 그 꿈을 이뤘다. 그다음에 꿈이 없어졌다. 누가 물으면 없는 듯 살다가 없었던 듯 가는 거라고 얘기는 한다. 그게 꿈은 아니다. 아직 농부라고 자칭하기 부족하니 사실은 꿈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봄의 끝물에 춘곤증은 여전했다. 고구마 밭에 차를 세우고 잠이 들었다. 좀처럼 꿈을 안 꾸는 편인데 깨고 나서도 내용이 선명했다. 섬진강을 거슬러 노란 토네이도가 몰아 닥치고 급기야 온 주변이 황금색 똥바다로 변하는 내용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기억은 또렷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색은 생시에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기로 오물을 뒤집어쓰는 꿈은 길몽이라고 했다. 농사 지으면서 횡재할 일이 없으니 이건 로또를 사라는 계시가 분명했다. 한번도 내 돈 주고 내 발로 복권을 사러 간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천명이니 어겨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준엄한 자세로 고구마 밭에 섰다. 날이 더웠지만 문제 될 것이 없다. 나는 곧 로또에 당첨될 사람이다. 태양을 마주하고 일을 해 나갔다. 해를 대하는 자세는 등지는 것보다 정면이 좋다. 특히 앉아서 밭을 매거나 괭이질할 때 그렇다. 챙이 큰 모자가 머리를 가려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고개와 상체도 숙이게 되니 몸의 일부도 가린다. 반대로 돌아서면 오히려 등짝이 타 들어간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해를 정면으로 대할 때 그림자의 면적이 더 작아지고 그 대부분은 모자의 몫이다.
“살포기 빌려 간 것 좀 갖고 오이라. 약속 없으믄 밥 먹고 가고.”
“그랴, 서두르지 말어
횡재 바라고 뎀비다가 피똥 싸”
장씨 아저씨의 말은 죽비다
일이 끝나갈 때쯤 장씨아저씨가 전화하셨다. 마침 살포기도 트럭에 싣고 온 참이었다. 밥도 주신단다. 뭔가 착착 맞아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가는 길에 로또 복권을 샀다. 욕심부리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2등 정도만 돼도 만족하리라 주문을 외웠다.
“이젠 농사가 뭔지 좀 알겄는가? 자네도 인자 10년 돼 가잖어.”
“예, 조금씩 알아가는 중인 것 같네요.”
“그랴. 서두르지 말어. 농사로 돈 모을 생각 말고. 애먼 정부지원 같은 거 받아서 뭐 지을 생각도 말고. 횡재 바라고 뎀비다가 피똥 싸는 놈덜 많응게. 근디 어디서 아카시아 냄새 겉은 게 난다?”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데 배가 살살 아파왔다. 낮에 한 줌 쥐어 먹은 아카시아 꽃이 문제가 됐다. 점점 배 속이 부글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방귀를 조금씩 살포하면서 압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는데 이런. 마지막 방귀는 기체가 아니었다. 몸이 굳고 숨이 멎었다. 아저씨께 급한 일을 깜빡했다고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말씀드리고 일어섰다.
어렵게 차에 올라 등과 허벅지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살짝 든 자세로 운전을 했다. 창문을 다 열어도 향기 아닌 냄새는 길게 진동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강렬했던 한낮의 꿈도 길몽이 아닌 예지몽이었다. 아카시아 한 방에 꿈도 추억도 날아갔다. 더 이상 내게 아카시아는 연애 시절 달콤한 추억의 향기가 아니다. 욕심과 환상을 깨 주는 각성제로 업그레이드됐다.
꿈은 계속 유지할란다. 형태만 만들었지 아직 내용을 채우진 못했다. 숫자 한 개도 안 맞는 복권은 안 살란다. 일확천금은 없을뿐더러 어쩌다 찾아온 횡재에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리고 다행이다. 달콤한 꽃 향기로 추억하던 연애 감정의 취기는 날아갔지만 맨 정신을 얻었다. 매년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나는 이제 정신이 말짱해질 예정이다.
▶필자 원유헌
[원유헌의 전원일기](14)봄의 끝물 허망한 꿈…괜찮다, 5월은 또 오고 내 진짜 꿈은 살아있으니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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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212230005&code=100100#csidx90ebd5bd7677dc6a6f03100023f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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