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우아한 ‘KOREA’에 다녀온 독일인들… ‘우아한 루저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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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17 19:46 조회 256 댓글 0본문
조선인들과 답사 떠날 행장을 꾸리는 크노헨하우어와 짐머만.(왼쪽) 라우텐자흐 교수와 여행한 조선인. 정은문고 제공.
“조선인은 나이를 계산할 때 이상한 관습이 있습니다. 오늘 아이가 태어나면 내일부터 한 살이라고 합니다.” 독일인 브루노 크노헨하우어(1861~1942)의 강연문 ‘KOREA’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독일 산림청 직원이었던 그는 1898년 2월부터 1899년 6월까지 대한제국에 머물면서 광물 분포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던 인물이다. 강원도 김성(지금의 김화)의 당고개 금광에서 채굴 작업을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베를린으로 돌아가 1901년 2월25일 독일식민지협회에서 조선에 관해 강연했는데, ‘KOREA’는 당시의 강연 전문이다.
이 책에는 80쪽에 달하는 그 강연문이 전재돼 있다. 독일 공무원이었던 크노헨하우어는 식민정책의 실무자로 조선에 왔지만 제법 세밀한 시선으로 정치사회적 상황을 살폈고, 이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문에서 조선인이 동아시아 3개국 중 가장 멋진 신체 조건을 갖췄다고 칭찬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외국인에게 유난히 친절한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수줍음을 많이 탄다”면서,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즐긴다”라고도 말한다.
기후, 건축물, 자연풍경, 의상에 대한 묘사도 등장한다. “조선은 더운 나라”라든가, “독일의 어떤 지역보다 추운 겨울을 보냈다” 등의 언급을 보면 독일인이 조선에서 사계절을 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당시에 이미 아파트를 지었던 독일의 시선으로 보자면 조선의 “단층 주택”은 “찰흙으로 벽을 세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오두막”이었다. 하지만 어느 집에나 있던 온돌은 이방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행길에 나선 그는 묘향산과 상원암의 풍경에 감탄하는가 하면, 조선 남자들의 갓과 가슴이 보이는 여성들의 저고리에도 시선이 머문다. “조선인들은 갓으로 큰 사치를 부립니다. 최고의 재료로 만들고 검은색으로 염색한 갓은 우리 돈으로 약 30마르크입니다.” 1900년대 초반 독일 광부의 월급이 약 26마르크였으니, 그가 보기에 조선의 갓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기혼 여성들이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가슴을 노출한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면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조선 여인은 자녀가 4세가 될 때까지 젖을 물립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 3명의 여행기를 통해 독일인들이 조선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떤 생각이 이들의 여행기 속에 스며들었는지를 알고 싶었다”라고 밝힌다. 시기적으로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있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12일부터 1910년 8월29일까지, 이른바 ‘한일병합’으로 불리는 경술국치(8월22일)까지 조선의 국명이었다. 앞서 언급한 크노헨하우어의 뒤를 이어 1913년에는 독일의 예술사학자 페테르 예센(1858~1926)이 부관연락선을 타고 조선에 왔다. 예센의 여행은 학자적 탐구심에서 비롯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보다 먼저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찾아” 일본에 들렀다가 “충격에 빠졌다”라고 고백하는데, 그가 목격했던 일본은 당시의 유럽인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자포니즘(일본풍)의 탄생지라기보다는 “전쟁 야욕으로 꽉 찬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우아한 ‘KOREA’에 다녀온 독일인들… ‘우아한 루저의 나라’
실망감을 안고 조선에 온 그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가 조선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조선은 “선비문학을 꽃피웠던 나라” “15세기에 활자를 채자하여 활자본으로 인쇄하는 인쇄 기술을 발명”하는 등, 찬란한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과 약탈을 방어한 후 거의 4세기 동안 쇄국을 단행”해, 스스로 “전설의 나라가 됐다”라고 바라본다. “안이한 관리들의 행태” “나라 전체를 몇몇 권세가 집안이 다스렸다”는, 비판적 견해도 내놓는다. 문화와 예술을 호평하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조선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크고 바른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모습의 사람들은 상의, 치마, 바지, 신발 모두 흰색으로 차려 입었으며, (…) 말총으로 직조한 높고 넓은 차양모자를 쓰고 모자끈을 턱 아래에 묶었다. 수많은 상점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로 끊임없이 흡연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등 우아한 루저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렇듯 책의 제목인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예센의 여행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1933년 압록강 어귀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여행했던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1886~1971)가 등장한다. 그는 7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의 지형학, 식물, 농업 등을 탐사하기 위해 1만5000㎞를 여행했다. 백두산 외에 지리산, 제주도, 울릉도 등을 다녔다. 책에는 그의 백두산 여행기가 전재됐는데,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달렸다. 말 그대로 백두산 탐사길에서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초점이다. 한데 그가 “강도”라고 지칭한, “기관단총을 들고 신출귀몰한”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벨기에식 권총을 소지한” “송화강 쪽으로 올라가는 22명이 넘는 무장한 무리”로도 표현되는 그들에 대해 저자는 “(김좌진이 지휘했던) 북로군정서의 일부이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선을 다녀간 이방인들의 기록에는 오류도 적지 않다. 짧은 기간 머물렀던 그들이 조선의 통사를 압축적으로 쓰려다보니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였을 것이다. 또한 기록자들의 혼란한 시선이 정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는 그런 오류와 혼란들을 지적하고 자신의 해석과 견해를 덧붙인다. 현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저자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냈는데, 대학도서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료들을 발굴해 이 책을 썼노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인은 나이를 계산할 때 이상한 관습이 있습니다. 오늘 아이가 태어나면 내일부터 한 살이라고 합니다.” 독일인 브루노 크노헨하우어(1861~1942)의 강연문 ‘KOREA’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독일 산림청 직원이었던 그는 1898년 2월부터 1899년 6월까지 대한제국에 머물면서 광물 분포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던 인물이다. 강원도 김성(지금의 김화)의 당고개 금광에서 채굴 작업을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베를린으로 돌아가 1901년 2월25일 독일식민지협회에서 조선에 관해 강연했는데, ‘KOREA’는 당시의 강연 전문이다.
이 책에는 80쪽에 달하는 그 강연문이 전재돼 있다. 독일 공무원이었던 크노헨하우어는 식민정책의 실무자로 조선에 왔지만 제법 세밀한 시선으로 정치사회적 상황을 살폈고, 이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문에서 조선인이 동아시아 3개국 중 가장 멋진 신체 조건을 갖췄다고 칭찬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외국인에게 유난히 친절한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수줍음을 많이 탄다”면서,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즐긴다”라고도 말한다.
기후, 건축물, 자연풍경, 의상에 대한 묘사도 등장한다. “조선은 더운 나라”라든가, “독일의 어떤 지역보다 추운 겨울을 보냈다” 등의 언급을 보면 독일인이 조선에서 사계절을 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당시에 이미 아파트를 지었던 독일의 시선으로 보자면 조선의 “단층 주택”은 “찰흙으로 벽을 세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오두막”이었다. 하지만 어느 집에나 있던 온돌은 이방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행길에 나선 그는 묘향산과 상원암의 풍경에 감탄하는가 하면, 조선 남자들의 갓과 가슴이 보이는 여성들의 저고리에도 시선이 머문다. “조선인들은 갓으로 큰 사치를 부립니다. 최고의 재료로 만들고 검은색으로 염색한 갓은 우리 돈으로 약 30마르크입니다.” 1900년대 초반 독일 광부의 월급이 약 26마르크였으니, 그가 보기에 조선의 갓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기혼 여성들이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가슴을 노출한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면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조선 여인은 자녀가 4세가 될 때까지 젖을 물립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 3명의 여행기를 통해 독일인들이 조선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떤 생각이 이들의 여행기 속에 스며들었는지를 알고 싶었다”라고 밝힌다. 시기적으로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있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12일부터 1910년 8월29일까지, 이른바 ‘한일병합’으로 불리는 경술국치(8월22일)까지 조선의 국명이었다. 앞서 언급한 크노헨하우어의 뒤를 이어 1913년에는 독일의 예술사학자 페테르 예센(1858~1926)이 부관연락선을 타고 조선에 왔다. 예센의 여행은 학자적 탐구심에서 비롯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보다 먼저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찾아” 일본에 들렀다가 “충격에 빠졌다”라고 고백하는데, 그가 목격했던 일본은 당시의 유럽인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자포니즘(일본풍)의 탄생지라기보다는 “전쟁 야욕으로 꽉 찬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우아한 ‘KOREA’에 다녀온 독일인들… ‘우아한 루저의 나라’
실망감을 안고 조선에 온 그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가 조선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조선은 “선비문학을 꽃피웠던 나라” “15세기에 활자를 채자하여 활자본으로 인쇄하는 인쇄 기술을 발명”하는 등, 찬란한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과 약탈을 방어한 후 거의 4세기 동안 쇄국을 단행”해, 스스로 “전설의 나라가 됐다”라고 바라본다. “안이한 관리들의 행태” “나라 전체를 몇몇 권세가 집안이 다스렸다”는, 비판적 견해도 내놓는다. 문화와 예술을 호평하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조선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크고 바른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모습의 사람들은 상의, 치마, 바지, 신발 모두 흰색으로 차려 입었으며, (…) 말총으로 직조한 높고 넓은 차양모자를 쓰고 모자끈을 턱 아래에 묶었다. 수많은 상점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로 끊임없이 흡연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등 우아한 루저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렇듯 책의 제목인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예센의 여행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1933년 압록강 어귀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여행했던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1886~1971)가 등장한다. 그는 7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의 지형학, 식물, 농업 등을 탐사하기 위해 1만5000㎞를 여행했다. 백두산 외에 지리산, 제주도, 울릉도 등을 다녔다. 책에는 그의 백두산 여행기가 전재됐는데,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달렸다. 말 그대로 백두산 탐사길에서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초점이다. 한데 그가 “강도”라고 지칭한, “기관단총을 들고 신출귀몰한”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벨기에식 권총을 소지한” “송화강 쪽으로 올라가는 22명이 넘는 무장한 무리”로도 표현되는 그들에 대해 저자는 “(김좌진이 지휘했던) 북로군정서의 일부이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선을 다녀간 이방인들의 기록에는 오류도 적지 않다. 짧은 기간 머물렀던 그들이 조선의 통사를 압축적으로 쓰려다보니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였을 것이다. 또한 기록자들의 혼란한 시선이 정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는 그런 오류와 혼란들을 지적하고 자신의 해석과 견해를 덧붙인다. 현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저자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냈는데, 대학도서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료들을 발굴해 이 책을 썼노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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