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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슬픔과 분노가 공동체의 규범을 대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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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1회 작성일 21-06-06 18:43

본문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 관심이 보여준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

손정민씨가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이후 벌어진 사회적 논란은 자못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 그 의혹을 퍼 나르는 언론, 거기에 거짓을 덧붙여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유튜버, 가짜 뉴스를 신뢰하며 다시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 이들 모두가 한데 뭉쳐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치 정해진 의례처럼 ‘친구 A씨’를 향한 온라인 공격과 신상털이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풍경이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 ‘플랫어스(flat Earth)’ 따위의 음모론, 혹은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건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발견할 수 있다(지난 5월2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손정민씨의 죽음을 둘러싼 거짓과 음모론을 겨냥했는데, 이는 2010년 MBC스페셜 ‘타블로, 스탠퍼드 가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에도 논란과 의혹은 머지않아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에 꽤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한강 공원에서 손정민씨의 죽음을 추모하며 ‘친구 A씨’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에 공감하며 슬픔과 분노에 잠긴 시민,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의심의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이야말로 그동안 한국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 온 주역이었다. 그렇다면 한강에 모인 그들을 “정의로운 시민”이라고 부르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가짜 뉴스와 음모론의 소비자가 되어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낡은 인식을 제거하자. 흔히 ‘진보’라고 불리는 성향에는 대중 운동을 무조건 긍정하는 경향도 포함된다. 즉, 시민의 자발적 움직임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기원은 역사적이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다수의 모임 자체가 곧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래서 2002년 당시 ‘진보 진영’ 대부분이 월드컵 거리 응원을 찬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인식에 충격을 준 첫 번째 사건은 아마도 극우파의 대규모 거리 집회일 것이다. 대략 2000년대 중반이 되면 ‘진보’와 ‘민주주의’가 거리와 광장을 독점하는 시대는 끝난다. 이때부터 대중 운동을 ‘진보’와 ‘보수’로 구별하는 전통이 생겨나고, 이후에 ‘촛불’과 ‘태극기’라는 정치적 상징으로 고정된다. 하지만 이제 이런 식의 구별도 의미가 없다. 예컨대 ‘조국 반대 촛불집회’와 ‘검찰개혁 촛불집회’ 중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가? 사회적 폭력에 분노하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하는 수십만의 시민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라인 전쟁, 인터넷 커뮤니티 단위로 진행되는 다양한 집단행동들을 기존의 인식틀에 따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른바 586 세력이 지금의 사회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인식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다. 대중 운동에 대한 긍정과 찬양은 “국가가 권력자와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있으므로,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과거 반독재 투쟁부터 최근의 세월호 참사와 ‘n번방’ 사건까지, 시민들은 국가 제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직접 진실을 파헤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왔다. ‘친구 A씨’에 대한 의혹 제기가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를 찾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은 이미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설사 그런 의혹 제기가 음모론의 영향 때문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무능한 국가 권력, 부패한 정치, 비정상적 언론을 탓할 뿐, 시민들의 집단행동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게 다 무능한 정부와 썩은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깔때기 논리와 같아서, 구체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가치 판단을 중지시킨다. 그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든, ‘친구 A씨’를 공격하는 시민들의 윤리적 책임과 행동의 정당성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한다.

국가를 대신해 시민이 직접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믿음의 현실적 효과는 이중적이다. 일단, 말 그대로 정의를 실현할 때가 있다(물론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정의’란 대부분 가해자 처벌과 신상 공개로 수렴한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공동체와 시민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제도와 공동체의 규범을 약화하는 역효과를 발휘한다. 즉,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은 여전히 권력자와 엘리트의 일로 간주되고, 시민의 역할은 제도 외부의 집단행동을 통해 그들을 비판하고 압박하는 것에 한정된다. 이러한 분리는 기존의 지배 질서를 그대로 답습한다. 실제로 지금 시민의 직접 행동은 대안적 제도를 구축하는 대신, 국가 제도 외부의 공간을 확장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여기서 도발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국가가 무능해서 시민이 직접 행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민이 직접 행동해서 국가가 무능해지는 것인가? ‘친구 A씨’를 향한 집단적 공격을 보고 있으면, 이 질문이 그냥 은유적인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시민의 직접 행동은 국가 기관과 제도의 매개 없이 물리적, 정치적, 문화적 힘을 행사한다. ‘네티즌 수사대’가 경찰을 대신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추천 수가 법원의 결정에 우선한다. 만일 이러한 행동의 목표가 제도 외부에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라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도 외부에서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느새 온라인 대중 운동의 중심이 된 국민청원에 들어가 보자. 추천 수 상위 목록 상당수가 사회적 폭력에 관련된 것인데, 그 핵심은 철저한 수사, 강력한 처벌, 신상 공개로 요약된다. 제도의 개혁은 공동체의 윤리적 규범을 수립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하지만, 시민의 정의는 오로지 가해자 개인의 처벌을 향한다. 수많은 이들이 범죄자 신상 공개를 요구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운동의 지향, 유형, 내용, 주체가 무엇이든 간에, 한국의 대중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반(反)제도적 경향을 보여왔다. 이때 제도란 단지 국가 기관이나 법률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일반에게 내면화된 공통의 윤리적 규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한 공동체의 규범 중 하나를 사례로 들어보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타인의 죄를 평가하는 것은 시민 각자의 자유다. 무죄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결백을 지지하고, 유죄라고 생각한다면 엄격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 오로지 국가 권력만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규제할 자격이 있다. 심지어 용서 불가능한 끔찍한 범죄자도 예외가 아니다.

손정민씨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놀랍게도 ‘친구 A씨’의 권리 문제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의혹 제기가 어떤 윤리적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는 애초에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시민의 집단적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오히려 지지, 공감, 분노, 슬픔, 증오 등이다. 그 작동 방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피해자에게 지지와 공감을, 가해자에게 분노와 증오를!” 이러한 감정의 논리가 민주주의적 윤리 규범을 대체하는 상황은 음모론과 가짜 뉴스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준다. 자신이 지지하는 피해자를 지켜주고 증오하는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규칙이 되면,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의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공통의 가치와 규범에 의해 유지되는 정치 공동체는 갈수록 약화하고, 공감과 증오의 대상에 따라 일시적으로 탄생했다 소멸하는 감정 공동체들만 재생산된다. 그들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투쟁이 지금 한국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6061533001&code=940301#csidxc5e5d44c34dbb92bf3bf59565dc0c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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