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다시 문제는 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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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화이부동]다시 문제는 싸가지다
“그렇게 압도적인 지지 속에 개혁 전권을 위임받는 정부가 근시일 내에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적처럼 그런 에너지가 모였을 때 잘 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게 너무 아쉽다. 오만·독선 같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교한 비전과 철학이 부족했던 게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장강명 작가가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비전’이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칼럼(4월14일)에서 4년 전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던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한 세대 뒤의 미래를 설계할 힘”이 이젠 사라져버린 걸 아쉬워하며 한 말이다. 문 정권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칼럼이다. 나는 칼럼 내용엔 흔쾌히 동의하면서도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반론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을 보태는 보론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태도’를 ‘비전·철학’과 별개의 것으로 본다. 당연하다. 어느 모로 보건 ‘태도’는 ‘비전·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태도’의 일부라 할 ‘싸가지’(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이르는 말)는 어떤가? 나는 그간 싸가지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가장 많이 들은 반론이 “싸가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어젠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기회를 빌려 한 걸음 더 들어간 내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내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어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그리고 개인이 아닌 집단의 세계에서 ‘태도’와 ‘비전·철학’, ‘싸가지’와 ‘정책·어젠다’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는 겸손의 명언을 남기긴 했지만, 실제론 자아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이룬 놀라운 과학적 업적에 비하면 그건 정말이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직장에서도 태도와 싸가지엔 문제가 있지만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럴 경우 싸가지 문제를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태도와 싸가지의 문제를 이렇게 개인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집단, 그것도 상대편과 경쟁을 해야 하는 정치적 집단에선 태도와 싸가지 문제를 그렇게 보아선 곤란하다. 바로 여기서 태도와 싸가지에 대한 오해가 빚어지는 것 같다.
정치적 집단의 태도와 싸가지는
비전·어젠다와 분리될 수 없어
문 대통령은 성찰적 회고록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를 반성했지만
현 정권은 스스로 무오류라 여겨
상대를 적폐 청산 대상으로 본다
집권 세력이 독선·오만에 중독 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어
다시 ‘싸가지 있는 정치’위해
정권의 성찰·협치가 필요한 때다
한 개인의 태도와 싸가지 문제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귀속된다. 물론 부정적인 평판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정치적 집단에선 그렇지 않다.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는 건 홀로 외로움을 감수하는 유별난 태도와 싸가지가 아니다. 집단정서를 대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싸가지다. 즉 집단사고가 지배하는 상황에선 강경파의 목소리가 돋보이기 마련인데, 서로 돋보이려고 강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싸가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싸가지 없는 언행을 보이는 사람은 집단 외부에선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망정 집단 내부에선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데에 훨씬 유리해진다. 강성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더불어 후원금도 더 많이 들어온다. 어느 정당의 정치인들이 “누가 더 싸가지 없는가?” 경쟁을 벌이다보면 그 정당은 골병이 들기 마련이고, 결국엔 민심의 철퇴를 맞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수없이 봐 왔다. 그럼에도 ‘싸가지 없기 경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이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더불어 집단 전체가 집단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결과를 성찰한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했다. 반성은 충분히 이루어졌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의 승리는 반성의 힘이라기보다는 박근혜와 코로나19가 헌납한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들을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무오류의 존재로 여기면서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독선과 오만이다. 반대편을 정당한 경쟁 세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반드시 몰아내야 할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보았다. 선의의 실력 경쟁을 할 뜻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적폐 청산이었다. 검찰 개혁은 적폐 청산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장 작가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랫동안 정치를 피했고, 국가의 미래 비전을 고민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그가 살면서 오래 보아 온 적폐는 검찰 권력이었고, 그래서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 같다. 그런데 많은 국민은 검찰 개혁이 왜 지금 한국 사회의 최우선 과제인지 궁금해한다.”
장 작가는 적폐 청산은 미래 비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문 정권에 적폐 청산은 ‘비전·철학’이자 ‘정책·어젠다’였다. 문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게 검찰 개혁이 왜 지금 한국 사회의 최우선 과제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라고 답할 것이다. 검찰 개혁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부동산 정책마저도 강자의 횡포를 통제하겠다는 적폐 청산 접근법으로 밀어붙였다.
적폐 청산을 제대로만 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 그런가? 문 정권 사람들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서 적폐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폐의 정도가 덜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문 정권이 밥 먹듯이 저지른 위선과 내로남불 앞에선 그런 차이는 무의미했다.
우리는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를 좋은 의미로만 쓰는 경향이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아예 없느니만 못한 것들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악독한 독재정권들에도 나름의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가 있었다는 걸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건 동료 인간에 대한 태도와 싸가지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선 그렇다. 집권세력이 독선과 오만에 중독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고, 갈등 비용이 급격히 치솟아 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어려워진다. 문 정권은 그간 독재정권 시절 반(反)독재 투쟁을 하듯이 국정운영을 해 왔다. 그 시절에 맹활약한 덕분에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문 정권의 핵심이자 실세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렇다면 민주 투사들은 민주화된 세상에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건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유는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라고 했듯이, 최고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문 정권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그들의 장래는 물론 정치와 국가의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문제는 그들의 태도와 싸가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 건 태도와 싸가지의 문제이며, 이런 토대 위에선 국민 다수가 원하는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싸가지 있는 정치’를 위해선 협치가 필요하다. 협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야당이 문 정권의 발목만 잡으려고 하는데 무슨 얼어죽을 협치냐?”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속도전을 욕구한다. 사실 협치는 낮은 자세로 온갖 고생을 해야 이룰 수 있으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역대 독재정권들도 민주주의를 비효율적인 낭비라고 주장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게다가 그간의 속도전으로 이룬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최근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을 초청해 가진 오찬 간담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협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젠 성패에 관계없이 큰소리 뻥뻥 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개혁을 의심하면서 국민과 더불어 같이 가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280300055&code=990100#csidx289385739a923c3b25b003994bf78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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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압도적인 지지 속에 개혁 전권을 위임받는 정부가 근시일 내에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적처럼 그런 에너지가 모였을 때 잘 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게 너무 아쉽다. 오만·독선 같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교한 비전과 철학이 부족했던 게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장강명 작가가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비전’이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칼럼(4월14일)에서 4년 전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던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한 세대 뒤의 미래를 설계할 힘”이 이젠 사라져버린 걸 아쉬워하며 한 말이다. 문 정권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칼럼이다. 나는 칼럼 내용엔 흔쾌히 동의하면서도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반론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을 보태는 보론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태도’를 ‘비전·철학’과 별개의 것으로 본다. 당연하다. 어느 모로 보건 ‘태도’는 ‘비전·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태도’의 일부라 할 ‘싸가지’(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이르는 말)는 어떤가? 나는 그간 싸가지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가장 많이 들은 반론이 “싸가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어젠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기회를 빌려 한 걸음 더 들어간 내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내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어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그리고 개인이 아닌 집단의 세계에서 ‘태도’와 ‘비전·철학’, ‘싸가지’와 ‘정책·어젠다’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는 겸손의 명언을 남기긴 했지만, 실제론 자아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이룬 놀라운 과학적 업적에 비하면 그건 정말이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직장에서도 태도와 싸가지엔 문제가 있지만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럴 경우 싸가지 문제를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태도와 싸가지의 문제를 이렇게 개인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집단, 그것도 상대편과 경쟁을 해야 하는 정치적 집단에선 태도와 싸가지 문제를 그렇게 보아선 곤란하다. 바로 여기서 태도와 싸가지에 대한 오해가 빚어지는 것 같다.
정치적 집단의 태도와 싸가지는
비전·어젠다와 분리될 수 없어
문 대통령은 성찰적 회고록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를 반성했지만
현 정권은 스스로 무오류라 여겨
상대를 적폐 청산 대상으로 본다
집권 세력이 독선·오만에 중독 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어
다시 ‘싸가지 있는 정치’위해
정권의 성찰·협치가 필요한 때다
한 개인의 태도와 싸가지 문제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귀속된다. 물론 부정적인 평판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정치적 집단에선 그렇지 않다.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는 건 홀로 외로움을 감수하는 유별난 태도와 싸가지가 아니다. 집단정서를 대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싸가지다. 즉 집단사고가 지배하는 상황에선 강경파의 목소리가 돋보이기 마련인데, 서로 돋보이려고 강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싸가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싸가지 없는 언행을 보이는 사람은 집단 외부에선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망정 집단 내부에선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데에 훨씬 유리해진다. 강성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더불어 후원금도 더 많이 들어온다. 어느 정당의 정치인들이 “누가 더 싸가지 없는가?” 경쟁을 벌이다보면 그 정당은 골병이 들기 마련이고, 결국엔 민심의 철퇴를 맞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수없이 봐 왔다. 그럼에도 ‘싸가지 없기 경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이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더불어 집단 전체가 집단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결과를 성찰한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했다. 반성은 충분히 이루어졌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의 승리는 반성의 힘이라기보다는 박근혜와 코로나19가 헌납한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들을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무오류의 존재로 여기면서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독선과 오만이다. 반대편을 정당한 경쟁 세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반드시 몰아내야 할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보았다. 선의의 실력 경쟁을 할 뜻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적폐 청산이었다. 검찰 개혁은 적폐 청산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장 작가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랫동안 정치를 피했고, 국가의 미래 비전을 고민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그가 살면서 오래 보아 온 적폐는 검찰 권력이었고, 그래서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 같다. 그런데 많은 국민은 검찰 개혁이 왜 지금 한국 사회의 최우선 과제인지 궁금해한다.”
장 작가는 적폐 청산은 미래 비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문 정권에 적폐 청산은 ‘비전·철학’이자 ‘정책·어젠다’였다. 문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게 검찰 개혁이 왜 지금 한국 사회의 최우선 과제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라고 답할 것이다. 검찰 개혁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부동산 정책마저도 강자의 횡포를 통제하겠다는 적폐 청산 접근법으로 밀어붙였다.
적폐 청산을 제대로만 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 그런가? 문 정권 사람들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서 적폐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폐의 정도가 덜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문 정권이 밥 먹듯이 저지른 위선과 내로남불 앞에선 그런 차이는 무의미했다.
우리는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를 좋은 의미로만 쓰는 경향이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아예 없느니만 못한 것들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악독한 독재정권들에도 나름의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가 있었다는 걸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건 동료 인간에 대한 태도와 싸가지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선 그렇다. 집권세력이 독선과 오만에 중독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고, 갈등 비용이 급격히 치솟아 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어려워진다. 문 정권은 그간 독재정권 시절 반(反)독재 투쟁을 하듯이 국정운영을 해 왔다. 그 시절에 맹활약한 덕분에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문 정권의 핵심이자 실세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렇다면 민주 투사들은 민주화된 세상에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건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유는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라고 했듯이, 최고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문 정권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그들의 장래는 물론 정치와 국가의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문제는 그들의 태도와 싸가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 건 태도와 싸가지의 문제이며, 이런 토대 위에선 국민 다수가 원하는 ‘비전·철학’이나 ‘정책·어젠다’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싸가지 있는 정치’를 위해선 협치가 필요하다. 협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야당이 문 정권의 발목만 잡으려고 하는데 무슨 얼어죽을 협치냐?”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속도전을 욕구한다. 사실 협치는 낮은 자세로 온갖 고생을 해야 이룰 수 있으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역대 독재정권들도 민주주의를 비효율적인 낭비라고 주장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게다가 그간의 속도전으로 이룬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최근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을 초청해 가진 오찬 간담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협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젠 성패에 관계없이 큰소리 뻥뻥 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개혁을 의심하면서 국민과 더불어 같이 가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280300055&code=990100#csidx289385739a923c3b25b003994bf78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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