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라이프치히(Leipz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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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을 앞두고 1989년 11월9일부터 국경제한이 풀리면서 동독여행을 할수 있게 되었다. 동독 검문소에서 통과되면 방문목적과 기간등을 확인하는 입국심사를 거쳐 비자를 발급받아 방문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1990년 4월 어느 봄날 차로 프랑크푸르트에서 7시간 정도 걸리는 에어푸르트(Erfurt)를 2박3일로 여행했다.
그곳은 당시 60년대의 가난했던 한국처럼 너무나 비참했다. 전혀 손질한 흔적이 없는 퇴색된 집들과 역사깊은 오래된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마치 죽은거리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며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수가 없었다.
석탄연기와 매연으로 정화되지 않은 공기가 얼마나 탁한지 기관지가 약한 필자는 숨을 쉴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정심시간이고 배도 고프고 해서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문들이 거의 닫혀 있었다.
다행히 조그만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돔성당과 주위를 대충보고 서둘러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베를린 장벽붕괴를 이끌었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1982년 11월부터 매주 월요일 젊은이들을 모아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그 작은 모임을 시작으로 점점 사람들은 불어났고 동서독 국경을 허무는 결정적 힘이 되었다.
성니콜라이교회 퓌러목사가 이끈 17시 에 시작하는 ‚월요평화기도회’가 동독의 붕괴와 통일의 촉매제가 되어 군중집결(Massenbewegung)이 되었다. 17시에 시내상점들이 열려있어 거리에는 행인들이 다니고 있었으며 같은시간 동독정권당(SED)회의가 17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제지 받지않고 모일 수 가 있었다.
니콜라이교회에서 1988년 2월, 여행의자유, 운동지지자들을 초대했다. 당시 동독인들은 여행과 언론, 선거의 자유가 없다는데 불만이 많았다. 동독정권은 교회앞 광장에 경찰을 배치하고 교통을 차단했으며 검문소를 세웠다.
비밀경찰 슈타지는 건너편 건물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해갔다. 하지만 월요기도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의 물결을 막을수는 없었다.
1989년 9월4일 월요기도회를 마친 700여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교회앞 광장으로 나갔다. 라이프치히는 수시로 산업박람회가 열리는 서독과 서방기자들의 왕래가 잦은 중심가에 있었던 탓에 동독정부는 자신들의 인도주의적이며 관용적이라는 점을 과시 하려는 목적으로 초기에 강제진압을 하지 않았다. 한번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자 시위인원은 매주 월요일마다 불어났다.
2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섰다. 평화를 기원하는 니콜라이 교회창문은 시민들이 가져다준 꽃으로 장식 되었고 교회 건물은 사람들이 가져다준 촛불로 둘러 싸였다. 10월 9일 평화기도회를 마친 2000여명이 교회문을 열고 광장을 향해 나섰다. 밖에서 7만명이 환호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 후 구동독 라이프치히 중심가의 성니콜라이교회는 공산정권과 베를린 장벽을 함께 무너뜨렸던 동독시민 혁명의 성지가 되었다. 니콜라이교회는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역사적 장소다. 450년후 이 교회에서 다시 자유를 향한 불꽃이 타올랐던것이다. 그들 젊은이들은 교회재단앞 대리석 바닥에 앉아 공산정권의 폭압에 억눌렀던 울분을 토해냈다.
10월9일 동독이 거리에서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를 외치는 시위대의수는 7만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중무장한 경찰들에게 10시간 넘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고 89명이 결박당한채 트럭에 실려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Gewandhaus Kapellmeister 지휘자 Kurt Masur가 참석했으며 Peter Zimmermann박사등 많은 유명인사들과 동독정당 비서및 정당인들까지도 대거 참가했다.
월요일 16일에는 12만명으로 10월23일에는 32만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는 동베를린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박람회에 참석한 서독 저널리스트는 비밀리에 데모상황을 서독 TV에 보냈고 매일 저녁 8시 뉴스시간에 방송되여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
1989년 11월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동독정권이 무너졌다.1985년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되면서 중앙유럽나라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했다. 1989년 10월7일 라이프치히에서 월요데모를 비롯해서 동독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권력은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의 것이 아니다" 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때에는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 ) 라며 독일통일을 기도했다. 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압력에 굴복하여 1989년 10월18일 사임했다.
1989년 11월9일에 국경제한이 풀리자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갔으며 동,서 베를린을 가로 막았던 검문소가 없어졌다. 1990년 10월3일 동독의 5개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우리부부는 동독여행이후 20년이 지나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기차를 타고 4시간 걸려 도착한 라이프치히 거리는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들과 세련되고 우아한 카페, 레스토랑 숍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확튀는 그림이 있다. 베르린벽이 무너져 자유를 찾은 수많은 군중들이 물밀듯이 나오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그린 중앙역을 나오면 금방 볼수있는 대형건물 벽화그림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거리마다 활기찬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통일후 대대적 재개발을 통해 획기적으로 변모한 이곳은 마치 조그만 프랑스 파리 같았다. 국제도시가 된 먹자골목에는 각나라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해 있었다. 우리들은 아담하고 조용한 일본 스시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서비스가 좋고 저렴하고 맛도 좋았다. 시내 중심지에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박물관이 있고 독일통일을 이끈 니콜라이교회가 우뚝 서 있었다.
사진설명
1.벽화(통일)
2. 니콜라이교회
3. 번화가 메들라거리(Mädler- Passage)에서 필자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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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당시 60년대의 가난했던 한국처럼 너무나 비참했다. 전혀 손질한 흔적이 없는 퇴색된 집들과 역사깊은 오래된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마치 죽은거리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며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수가 없었다.
석탄연기와 매연으로 정화되지 않은 공기가 얼마나 탁한지 기관지가 약한 필자는 숨을 쉴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정심시간이고 배도 고프고 해서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문들이 거의 닫혀 있었다.
다행히 조그만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돔성당과 주위를 대충보고 서둘러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베를린 장벽붕괴를 이끌었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1982년 11월부터 매주 월요일 젊은이들을 모아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그 작은 모임을 시작으로 점점 사람들은 불어났고 동서독 국경을 허무는 결정적 힘이 되었다.
성니콜라이교회 퓌러목사가 이끈 17시 에 시작하는 ‚월요평화기도회’가 동독의 붕괴와 통일의 촉매제가 되어 군중집결(Massenbewegung)이 되었다. 17시에 시내상점들이 열려있어 거리에는 행인들이 다니고 있었으며 같은시간 동독정권당(SED)회의가 17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제지 받지않고 모일 수 가 있었다.
니콜라이교회에서 1988년 2월, 여행의자유, 운동지지자들을 초대했다. 당시 동독인들은 여행과 언론, 선거의 자유가 없다는데 불만이 많았다. 동독정권은 교회앞 광장에 경찰을 배치하고 교통을 차단했으며 검문소를 세웠다.
비밀경찰 슈타지는 건너편 건물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해갔다. 하지만 월요기도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의 물결을 막을수는 없었다.
1989년 9월4일 월요기도회를 마친 700여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교회앞 광장으로 나갔다. 라이프치히는 수시로 산업박람회가 열리는 서독과 서방기자들의 왕래가 잦은 중심가에 있었던 탓에 동독정부는 자신들의 인도주의적이며 관용적이라는 점을 과시 하려는 목적으로 초기에 강제진압을 하지 않았다. 한번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자 시위인원은 매주 월요일마다 불어났다.
2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섰다. 평화를 기원하는 니콜라이 교회창문은 시민들이 가져다준 꽃으로 장식 되었고 교회 건물은 사람들이 가져다준 촛불로 둘러 싸였다. 10월 9일 평화기도회를 마친 2000여명이 교회문을 열고 광장을 향해 나섰다. 밖에서 7만명이 환호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 후 구동독 라이프치히 중심가의 성니콜라이교회는 공산정권과 베를린 장벽을 함께 무너뜨렸던 동독시민 혁명의 성지가 되었다. 니콜라이교회는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역사적 장소다. 450년후 이 교회에서 다시 자유를 향한 불꽃이 타올랐던것이다. 그들 젊은이들은 교회재단앞 대리석 바닥에 앉아 공산정권의 폭압에 억눌렀던 울분을 토해냈다.
10월9일 동독이 거리에서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를 외치는 시위대의수는 7만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중무장한 경찰들에게 10시간 넘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고 89명이 결박당한채 트럭에 실려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Gewandhaus Kapellmeister 지휘자 Kurt Masur가 참석했으며 Peter Zimmermann박사등 많은 유명인사들과 동독정당 비서및 정당인들까지도 대거 참가했다.
월요일 16일에는 12만명으로 10월23일에는 32만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는 동베를린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박람회에 참석한 서독 저널리스트는 비밀리에 데모상황을 서독 TV에 보냈고 매일 저녁 8시 뉴스시간에 방송되여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
1989년 11월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동독정권이 무너졌다.1985년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되면서 중앙유럽나라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했다. 1989년 10월7일 라이프치히에서 월요데모를 비롯해서 동독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권력은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의 것이 아니다" 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때에는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 ) 라며 독일통일을 기도했다. 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압력에 굴복하여 1989년 10월18일 사임했다.
1989년 11월9일에 국경제한이 풀리자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갔으며 동,서 베를린을 가로 막았던 검문소가 없어졌다. 1990년 10월3일 동독의 5개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우리부부는 동독여행이후 20년이 지나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기차를 타고 4시간 걸려 도착한 라이프치히 거리는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들과 세련되고 우아한 카페, 레스토랑 숍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확튀는 그림이 있다. 베르린벽이 무너져 자유를 찾은 수많은 군중들이 물밀듯이 나오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그린 중앙역을 나오면 금방 볼수있는 대형건물 벽화그림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거리마다 활기찬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통일후 대대적 재개발을 통해 획기적으로 변모한 이곳은 마치 조그만 프랑스 파리 같았다. 국제도시가 된 먹자골목에는 각나라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해 있었다. 우리들은 아담하고 조용한 일본 스시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서비스가 좋고 저렴하고 맛도 좋았다. 시내 중심지에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박물관이 있고 독일통일을 이끈 니콜라이교회가 우뚝 서 있었다.
사진설명
1.벽화(통일)
2. 니콜라이교회
3. 번화가 메들라거리(Mädler- Passage)에서 필자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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